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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이야기꾼 Oct 29. 2024

행복을 위한 <만족 지연>

  금(金) 중에 가장 귀한 금이 무엇이겠는지요? 황금(黃金)도 있고 백금(白金)도 있지만 지금(只今)이 가장 귀한 금입니다. 물론 지금의 동메달과 4년 후의 금메달의 가치의 우위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그 다름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동메달에 대한 불만을 금메달 획득의 동력으로 삼는다면 금메달을 딸 때까지의 삶은 불행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습니다. 4년 후에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때의 허망함은 또 어떻겠는지요. 지금의 동메달에 행복해하고 그 행복을 바탕으로 금메달에 도전하는 자체를 행복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삶은 과정도 행복이요 결과도 행복인 삶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지금의 행복이 미래 행복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행복은 지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 송나라에 원숭이를 무척 좋아하는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있었지요. 원숭이가 늘어나자 먹이가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원숭이에게 도토리 8개씩을 주었나 봅니다. 7개로 줄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도토리를 아침에는 3개씩, 저녁에는 4개씩 주겠다’고 했지요. 원숭이들은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아마 그때가 아침이었나 봐요. 매일 아침 4개씩 먹던 도토리를 3개밖에 못 먹게 생겼으니 원숭이의 불만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자 저공은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씩 주겠다’고 했죠. 그러자 원숭이들이 기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전적 측면에서 보면 원숭이는 눈앞의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선택해야 어리석은 존재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미래에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현재 배고픔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의 행복감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지금 배불리 먹어야 열심히 놀 수도 있고 열심히 일도 할 수 있죠. 지금 배고프면 저녁까지 버틸 힘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행복이 눈앞에 있는데, 그리고 그 행복이 미래 행복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데 굳이 지금의 행복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겠는지요? 이렇게 본다면 미래의 만족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지연시키지 않은 원숭이의 선택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결과보다 과정에서 행복감을 찾아야 합니다. 결과는 순간이고 과정은 영속적입니다. 어떤 결과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다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대추 한 알’이라는 장석주 시인의 시는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과정을 행복하게 수용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장석주, ‘대추 한 알’     


  붉게 읽은 대추가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대추는 험난한 과정을 모두 이겨냈습니다. 지난 여름의 태풍도 몇 개 견뎌내고, 지독한 무더위와 땡볕도 받아들였습니다. 벼락과 천둥은 물론 무서리도 이겨냈습니다. 초승달마저 진 어둠의 외로움을 별을 벗삼아 떨쳐냈습니다. 작은 대추 한 알이지만 인간이 겪어야 할 온갖 풍상을 견디고 이기고 품어 비로소 붉은 대추 한 알이 되었습니다. 

  대추는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등을 배척하고 밀어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면에 받아들였습니다. 내면에 받아들였기에 작은 열매 안에 온 우주를 품을 수 있었습니다. 대추가 미래의 만족만을 위해 태풍과 땡볕을 견뎠다면 잘 익은 대추의 만족감은 최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익은 대추일수록 먹거리로 수난을 당하고, 상품으로 팔려나가니 오히려 만족감은 최하가 됩니다. 대추에게 중요한 것은 천둥과 무서리를 견디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대추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가 90세가 넘었는데도 하루 3시간 이상 첼로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이웃집 사람이 묻습니다. “왜 그 나이에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하세요?” 카잘스는 “요즈음 실력이 조금 느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합니다. 

  90세의 카잘스가 연주회 준비를 위해 연습을 했겠습니까? 누구에게 과시하기 위해 연습을 했겠습니까? 결과를 염두에 두고 연습을 한 것이 아니라 연습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연습하면서 실력이 향상되는 것에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겠죠. 카잘스는 미래의 만족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아가며 연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을 위해 연습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현재에도 재미있어야 하고, 현재의 재미가 미래의 유익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칠석(七夕)과 관련된 견우직녀 설화가 있습니다. 직녀(織女)는 천제(天帝)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기도 하고 부지런하기도 하였습니다. 천제는 손녀를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목동인 견우(牽牛)와 혼인시킵니다. 이들 부부는 신혼의 재미에 빠져 베짜고 소먹이는 일을 게을리 합니다. 이에 천제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게 하고, 일년에 한 번, 7월 7일 칠석날에만 만나게 합니다. 칠석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가 놓은 오작교(烏鵲橋)라는 다리를 건너 잠깐 만나고 또 일년을 헤어져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설화에서 견우와 직녀는 미래의 유익함을 멀리한 채 현재의 재미만 탐닉하다가 이별이라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일년에 한번 잠깐 만났다가 헤어져 일년을 그리워하다가 또 하루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리워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서정주 시인은 현재의 재미와 미래의 유익함을 아우르는 ‘견우의 노래’라는 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 갔다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서정주, ‘견우의 노래’     


  견우와 직녀에게는 1년 365일 중에 칠월칠석 단 하루만 만남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364일은 서로 헤어져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견우와 직녀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364일의 기다림과 1일의 만남이라는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견우는 자신은 ‘암소를 먹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직녀는 ‘비단을 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만날 날을 기다리자고 직녀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견우는 현재의 기다림의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야 할 삶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견우는 미래의 만남이라는 만족을 위해 현재를 고통 속에 밀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364일을 눈물로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과 364일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을 맞이하는 것 중 중에서 후자가 행복함은 불문가지가 아니겠는지요. 이런 마음가짐이 있으니 ‘이별’이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별의 깊이가 깊을수록 사랑의 깊이가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테니스 동호인들이 테니스를 칩니다. 이겼을 때의 정신적 유익함을 위해 악착같이 게임에 몰입하다 보면 건강을 잃을 수도 있고, 동호인들과의 친목도 상할 수 있습니다. 이기든 지든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게임 자체에 재미를 느낀다면 건강도 친목도 다질 수 있습니다. 학생이 1등만을 목표로 공부하는 것보다 공부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알아가는 과정에 재미를 느낀다면 현재도 재미있고 미래도 유익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겪게 되어 있고 그 일을 견디게 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견뎌야 할 일이라면 미래의 유익함만을 기준으로 견디기보다는 견디는 자체를 재미있게 생각하면서 견디는 것이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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