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문학 이야기꾼 Oct 22. 2024

<만족 지연>의 문학적 사례들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梅花)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김광림, ‘산 9’     


  이 시는 두 장면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있습니다. 첫 장면은 한여름의 더위와 한겨울의 추위를 견뎌낸 매화가 눈 속에 꽃을 피운 장면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한여름의 더위와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독경과 면벽 수행에 정진한 노스님의 득도에 따른 미소 장면입니다. 현재의 고통을 인내한 매화나무가 꽃을 피운 장면이나 현재의 고행을 견뎌낸 노스님의 득도 장면은 보는 이들에게도 매화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노스님은 득도(得道)라는 미래의 만족을 위해 현재의 욕구나 즐거움을 뒤로 미루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만족 지연’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화도 탐스러운 꽃을 피운다는 미래의 만족을 위해 혹독한 더위와 추위라는 현재의 고통을 견뎌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매화 역시 ‘만족 지연’을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마시멜로를 하나 더 먹겠다는 미래의 만족만을 위해 현재의 15분을 버리듯 보낸 실험 속의 유아처럼 매화는 꽃을 피우겠다는 일념만으로 현재의 더위와 추위를 견뎌냈을까요?  매화나무에게 여름과 겨울은 꽃을 피우는 초봄과 마찬가지로 삶의 일부이자 과정입니다. 꽃을 피우는 것이 매화나무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라면 꽃을 피운 후의 삶은 또 어찌 되겠습니까. 꽃을 피운 후 나무가 꽃만을 매달고 있다면 매화나무는 열매도 없고 후손도 없습니다. 꽃은 기꺼이 열매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며 열매는 후손을 위해 기꺼이 땅에 떨어져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매화나무에게 꽃은 최상의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노스님도 득도(得道)라는 미래의 만족만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버리듯이 고행했을까요? 노스님에게는 고행의 아픔도 득도의 미소도 모두 삶의 일부이고 과정입니다. 만약 득도의 미소만을 위해 고행했다면 득도하지 못했을 때의 노스님의 삶은 송두리째 버려진 삶이 되고 맙니다. 노스님은 가부좌를 틀고 면벽 정진하는 그 자체를 삶의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했기에 득도의 미소가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보다 더 좋은 미래를 무시하고 현재를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현재의 가치가 더욱 빛나고 현재의 가치가 빛나기 때문에 미래가 만족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충실히 살면 미래가 스르르 열리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조선시대 문신인 김만중(1637~1692)은 <구운몽(九雲夢)>이라는 걸출한 소설을 남깁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성진’과 ‘소유’는 동일인이지만 현실의 ‘성진’의 삶과 꿈속의 ‘소유’의 삶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중국 형산에 연화봉이라는 높은 봉우리에 불법을 연마하는 연화도량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스승 육관대사는 제자 오륙백 명에게 불법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성진(性眞)’이라는 제자는 20세로 불경을 통독했으며 육관대사의 가장 뛰어난 제자입니다. 하루는 육관대사가 성진에게 동정호 용왕에게 심부름을 보냅니다. 용궁에 도착한 성진은 용궁의 화려한 음식과 술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개울에 놓인 좁은 다리를 지나면서 다리에 걸터앉아 있는 여덟 명의 선녀를 만나게 되죠. 길을 비켜달라는 핑계로 팔선녀들과 꽃을 주고받은 후 연화도량으로 돌아온 성진은 속세의 여인과 음식 생각 때문에 수행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안 스승이 성진을 내칩니다. 사실은 이 부분부터 꿈속 이야기입니다. 꿈속에서 성진은 양처사의 아들 ‘양소유(楊少遊)’로 태어납니다. 소유가 16세가 되자 과거(科擧)를 보는 것을 시작으로 벼슬은 승승장구, 전쟁에서는 연전연승, 가정에서는 팔선녀를 부인으로 두고,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의 늘그막에 양소유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삶의 덧없음을 느낍니다. 그 순간 육관대사가 꿈속의 ‘소유’를 현실의 ‘성진’으로 인도합니다. 

  꿈을 깨고 나니 화려한 집도, 여덟 부인도 간 곳이 없고 자신은 홀로 작은 암자에 불경을 앞에 두고 앉아 있을 뿐입니다. 인생이 일장춘몽임을 깨달은 성진은 육관대사의 가르침을 받아 불생불멸의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스승 육관대사의 뒤를 이은 성진은 연화도량의 스승이 되어 대중들에게 크게 가르침을 베풀게 됩니다.

  만약 20세 청년 ‘성진’이 꿈속에서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몸은 연화도량에서 불도에 정진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마음은 항상 속세의 부귀영화를 그리워하며 지냈을 겁니다. 깨달음이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고행이라는 선택지만을 선택해 평생을 불만족의 고행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었을 겁니다. 그러나 꿈속에서나마 속세의 입신양명이 덧없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현재 불도에 정진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미래의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꿈을 꾼 이후 성진은 미래의 만족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수행을 고행으로 여기지 않고 삶의 과정으로 즐겁게 수용했기에 미래에 불생불멸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의 시조

    

  조선 중기의 문신인 ‘양사언’이 지었다고 하는 이 시조도 ‘만족 지연’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태산(泰山)은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산으로, 문학에서는 매우 높아 오르기 어려운 산을 말할 때 언급되는 산입니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 하더라도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결국 오를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작품으로 현재에도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태산에 오르는 것을 현재의 개념으로 비유하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것이나 수능 만점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르고 수능 만점을 받았을 때의 만족을 위해서 현재의 고통은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이 작품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만족 지연이죠. 그러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거나 수능 만점을 받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재 삶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고도 목표에 도달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목표 도달이 불발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까지의 노력은 보상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냥 산을 오르기를 즐기고, 공부하기를 즐기다보면 정상에 설 수 있고, 수능 만점에 근접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을 만족으로 보고 그 만족을 위해서 현재의 즐거움을 지연시키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가 양식이 떨어져 관직에 있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며칠 후에 큰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그때 도와줌세”라고요. 그러자 장자는 “내가 여기 오는 길에 누가 부르기에 돌아봤네.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에 붕어 한 마리가 한 바가지 물로 자기를 살려달라고 했네. 그래서 내가 왕께 건의해서 강물을 끌어다가 살려 주겠다고 했다네.” 하고 친구의 집을 그냥 나갔다는 겁니다. ‘철부지급(轍鮒之急)’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입니다. 철부지급은 ‘수레바퀴 자국 속에 있는 붕어의 위급’을 뜻하죠.

  그렇습니다. 붕어에게는 지금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한데, 붕어가 죽은 후에 강물을 만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한 바가지의 물이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항변할 사람도 있겠지요. 임시방편일지라도 현재의 위기를 넘겨야 미래가 있지 않을까요? 일 년 후의 강물이 근본적인 방법일지라도 지금은 물 한 바가지가 붕어에게는 더 소중하지요. 미래의 만족은 오늘을 희생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붕어가 오늘 죽고 나면 내일이 없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로나마 오늘 만족해야 그 힘으로 만족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