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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이야기꾼 Nov 05. 2024

닻 내림 효과

    누구가 삼공(三公)보다 낫다하더니 만승(萬乘)이 이만하랴

    이제야 생각하니 소부 허유 약았더라

    아마도 임천한흥(林泉閑興)을 비길 곳이 없어라

            -윤선도, <만흥(漫興)> 중에서     


  이 작품은 고산 윤선도(1587~1671)의 ‘만흥’이라는 여섯 수로 된 연시조의 네 번째 수입니다. ‘만흥(漫興)’은 흥겨움이 마음에 가득 찼다는 뜻으로 벼슬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흥취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초장에서 삼공보다 나은 대상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생략된 대상은 ‘자연에서의 삶’입니다. 화자는 자연에서의 삶이 삼공(삼정승)보다 낫고, 만승(천자-황제)보다 낫다고 합니다. 중장에서 황제 자리를 마다한 소부와 허유가 약았다(영리했다)고 합니다. 종장에서 임천(林泉)은 수풀과 샘인데 자연을 말하죠. 한흥(閑興)은 한가로운 흥취를 말합니다. 임천한흥(林泉閑興)은 자연 속에서 느끼는 한가로운 흥취로 강호한정과 같은 의미입니다. 화자는 이 작품에서 황제의 삶보다 자연에서의 삶이 낫다고 선언합니다.  

   

  조선시대 능력 있는 사대부들의 길은 크게 두 갈래가 있습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과 강호한정(江湖閑情)의 길이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대부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가문(家門)을 중시하는 관습에 따라 과거 시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입신양명을 사대부의 길이라고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과거에 급제한 사대부들은 벼슬길로 나아가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붕당 정치의 필연적 귀결로서 낙향하여 자연을 벗삼아 고향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붕당으로 인한 당파 싸움이 원인이 되어 낙향한 경우도 있지만 벼슬보다 자연이 좋아 스스로 낙향하여 강호한정한 경우도 있습니다. 


  윤선도는 입신양명보다 강호한정이 체질적으로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윤선도에게 벼슬은 오히려 삶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는 벼슬로 인해 여러 차례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강호한정의 체질이 많은 시조 작품을 남기는 동력으로 작용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윤선도의 <만흥(漫興)>은 그가 벼슬에 뜻이 없다는 자신의 마음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자연 속에서 삶이 삼정승보다 낫고 임금보다 낫다고 선언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방향에 닻을 내린 것입니다. 자신에게 벼슬을 줄 테니 조정으로 나오라는 말을 원천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닻 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합니다. 닻을 내린 배가 크게 출렁거리지 않는 것처럼 처음 제시된 정보가 기준점이 되어 이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닻 내림 효과는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실험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 상당수가 유엔에 가입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카너먼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유엔에 가입한 나라들 가운데 아프리카 국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몇 퍼센트 되는지 물었습니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룰렛 돌림판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 돌림판에는 0에서 100까지의 수가 쓰여 있었는데, 실제로는 10과 65 두 수 중 하나에서 멈추게 조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숫자판을 돌려서 65가 나온 사람들은 평균 45퍼센트라고 대답했고, 10이 나온 사람들은 평균 25퍼센트라고 대답했습니다. 큰 수가 나온 사람들은 높은 비율로 대답하고, 작은 수가 나온 사람들은 낮은 비율로 대답한 것입니다.

  10과 65란 수는 유엔 가입 국가 중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실험 참가자들은 이 수에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한 숫자를 답한 것입니다. 이처럼 처음 제시된 정보가 기준점이 되어 그 기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답을 하는 것, 바로 닻 내림 효과입니다. 

    

  ‘만흥’이라는 시조에서 화자는 자연 속에서의 삶을 살겠다고 닻을 내렸습니다. 자연이 기준점이 되니까 소부와 허유라는 은사(隱士)들을 소환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임천한흥에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당연한 것이 되죠. 정치적 목적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런 화자에게 벼슬하라고 조정에 나오라고 권하는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조선 사대부들 중에는 드물게 학문수양을 제1의 가치로 둔 사람도 있습니다. 학문수양은 입신양명이 아니라 고향에서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내는 것이니 넓은 의미의 강호한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퇴계 이황(1502~1571)은 목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무엇보다도 좋았나 봅니다. 퇴계에게 학문수양은 보여주기식 취미가 아니라 진짜 취미였던 모양입니다.    

 

    당시에 가던 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 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고

    이제야 돌아왔으니 딴 데 마음 두지 말으리

            -이황, <도산십이곡> 중에서  

   

  이 작품은 퇴계 이황이 남긴 <도산십이곡>이라는 12수로 된 연시조 중 열 번째 수입니다. ‘당시에 가던 길’은 학문수양의 길을 뜻합니다. 퇴계는 벼슬살이 때문에 몇 해 동안 학문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수양의 길로 돌아왔으니 벼슬살이의 마음은 먹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퇴계는 ‘딴 데 마음 두지 말’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벼슬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데 닻을 내린 것입니다. 벼슬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벼슬에 닻을 내린 사람도 있는데 벼슬하기 싫어서 학문수양에 닻을 내린 사람이 있으니 사람마다의 가치관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50% 할인 행사를 하는 백화점에서는 원래 가격이 표시되어 있는 가격표를 제거하지 않고 보이도록 한 상태에서 할인 가격표를 옆에 붙입니다. 이 가격표를 보고 사람들은 할인 가격의 가치를 원래 가격을 기준으로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5만원에 옷을 샀으나 그 옷이 10만원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옷을 사죠. 지불할 값보다 가치가 곱절이니 쉽게 소비가 되는 것입니다. 백화점의 판매 전략이죠. 처음 제시된 정보가 이후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닻내림 효과’가 광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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