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세(1)

by 김한라

저저번 달쯤 부턴가? 숏폼 창시자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내 생활을, 이른 수면을, 눈 건강을, 자기 효능감을 좀먹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숏폼은 거머리, 한강 변 하루살이, 장맛날 다 젖은 바지 밑단 같은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이지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똑똑한 심리학자와 석박사, 개발자들이 모여서 인간이 쉽고 빠르게 중독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데 정말 쥐덫에 걸린 생쥐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이 쥐덫을 놓을 때 당연히 잡힐 거라 여기고 약간의 의심도 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석사는 숏폼을 만들어서 oo구에 사는 한 석사를 농락한다…

그 석사의 집중력은 숏츠만 해졌다......



내가 퍼붓는 저주는 저들도 자기들이 만든 숏폼에 제대로 중독되어 하루 종일 한 손으로 폰을 들고 엄지손가락으로 휙휙 넘겨대다가... 엄지손가락 관절이 살짝 쑤시기 시작했는데도 멈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감 있는 모습 아닐까? 분리수거 혹은 플로깅... 다시 생각해 보니 줍는다고 주워지는 것도 아니네... 이로써 숏폼은(정확히는 중독될 수밖에 없게 설계된 숏폼 서비스 구조는) 바른생활의 적폐다.


그래도 일단 주워라..


암튼 지난 몇 달간 어떻게 된 일인지 내 취향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알고리즘에 압도당해 때를 가리지 않고 엄지손가락을 놀려 왔는데, 그 쓰레기 같은 시간 소비를 인지하면서도 못 멈추는 내 머리의 한계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유튜브와 인스타 사이를 유영하는 몇 분이 하루의 빈틈을 메꾸고 결과적으로 24시간 내내 영 상쾌하지 않은 기분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게 구린 하루는 구린 내일을 만들고 구린 일주일을, 구린 한 달을, 구린 상반기를 만들고는 한다. 실제로 나의 2023 상반기는... 그저 그럼 - ( ) - 구림 그 사이쯤인 듯하다.


그리고 며칠 전 어디서 '저자세'라는 표현을 들었고 그건 바로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활에 대해서! 인생에 대한 저자세라고 하면 OTL 자세가 생각나며 굴복감과 패배감까지 드므로 패스...


어디서 들었긴 내가 이런 말 들을 데라곤 유튜브와 인스타밖에 없다. 한 1년 새 누가 내가 아는 지식을 말하거나 그것을 조금 틀리게 말했을 때, 그래서 내가 다시 ‘어 나도 그거 알아’ 라거나 ‘그게 아니고 이걸걸?’이라고 말해야 할 때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출처가 기사도 책도 아니고 어느 유머 계정의 불펌 게시물이라서...ㅋㅋ 그래서 어느샌가 아는 척을 덜 하게 되었는데 이건 좋은 것 같기도?



암튼 저자세란 표현은 아마도 인간관계를 조언하는 영상에서 나온 것 같았고 “상대가 누구든 저자세를 취하지 마세요~” 하는 메시지였던 듯한데 이건 요즘 내 생활 전반의 태도와 닮아있다. 일주일 내내 여기저기 끌려다니지만 무엇에도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으며 의욕도 성취도 없는 상태. 한마디로 고양감 제로인... 갓생 지망생 아닌 갓생 지양생...


예전엔 어느 정도 하루를 꽉 채워 보내면 기분이 바닥으로 내려가진 않았던 것 같은데. 바쁘게 지내는 것만으로 머리가 맑은 시기는 지난 건가? 덜 바쁜 건가? 중요한 일들을 잘 마무리하느라 바쁜 하루와는 질이 달라서 그런가.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내 주요 임무는 홍보실에서 소식지 그만 좀 보내라고 성내는 분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일이긴 하다… 아니면 신문 속 대학교 광고 뒤지기…


아니면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럴지도. 며칠 전 신촌을 걷다가 땀이 너무 나는 바람에 공중 등목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체력이 쓰레기와 다름없는 사람은 한겨울, 한여름이 너무 힘들다. 뭐 하나를 겨우 하면 다른 걸 할 체력과 정신이 없다. 필라테스 센터에서 자꾸 전화가 온다.


... 회원님 만료 기간이 다되어 가시는데 안 오시냐고.... 횟수가 잔뜩 남았는데...

저도 알죠.. 암튼 죄송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생활은 마음이 약간 불편한 것만 참으면 은근히 달콤하다. 핵심을 피하는 일은 괴롭지만 쉽다. 영양은 쏙 빼고 달콤하기만 한 탕후루처럼.


그리고 정말 어이없지만 나는 요즘 탕후루에 빠졌다...... 입맛이 정신머리도 따라가나? 이것도 숏폼 때문이라고 하면 믿어줄까? 내 알고리즘이 탕후루로 도배된 이후부턴데 어떤 사람은 온갖 걸 갖다가 탕후루 해 먹고 또 어떤 사람은 전국 팔도의 탕후루 가게를 도장 깨기 한다... 그래서 무슨 맛일까 궁금해졌고 큰돈 주고 맛보고 말았다. 나 단 거 싫어하는데.. 숏폼이 내 입맛까지 유린하다니...


진짜 어이없지만 내가 탕후루에 단단히 빠진 관계로 이 얘기는 메인 감이다. 한두 단락으론 부족하니까 다음에 다시 얘기해야겠다…


암튼 이번 주에 한 달 만에 레슨을 받아서 숙제가 생겼다. 숙제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다. 유학을 염두에 두고 곡들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7월부터 독일어 학원 다니고 있는데, 까먹은 부분 복습할 겸해서 스타터 반을 추천받았다.


근데 아무래도 여기 선생님들이 내 실력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 나 이래 봬도 독일어 제자리걸음 3년 찬데... 제자리걸음이야말로 습득과 반복의 사이클인데...


솔직히 월반을 해도 될 것 같지만, 독일어를 처음 배우는 새싹들과 한 반에 있으면서 독일어의 악랄한 규칙들을 마주하고 차갑게 굳어가는 그들의 얼굴과, 아랑곳없이 새롭게 쏟아지는 규칙들에 놀라 뒤로 나자빠지는 광경을 구경하는 게 재미나서 그럴 수가 없다.



여러분 그건 시작에 불과한걸요~ 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영어는 a, the로 퉁치고 마는 관사를 독일어는 무려 32개나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첫 시간에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는 얼굴을 다함께 하고서 하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외워진답니다. 비법은요? 공부 못하는 사람이 문제집 앞부분만 새까맣게 조지는 것처럼, 독일어 기초파트를 머릿속으로 수만 번도 더 조지는 것!


어라 어딘가 재수학원 9수생 마인드와 닮았네...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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