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무슨 재미로 사냐고들 한다. 사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독서, 산책, 조금 힘들지만 아이와 놀기. TV를 두지 않은 이유가 있다. TV에게 한자리를 내어주면 우리 가족의 뇌를 잠식하고 노예로 만들어버릴 것 같아서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컴퓨터와 삼국지 게임 CD를 사주셨다. 생애 처음 맛본 게임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때부터였다. 미디어의 노예가 된 것은. 게임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고, 다른 일들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게임보다 곤충채집, 야구, 농구를 더 즐겼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내 뇌는 잠식되어 갔고, 특히나 방학 때는 하루 일과 대부분을 게임에 쏟았다. 누가 내 뇌를 쥐고 있는 듯 벗어나는 게 어려웠다. 청소년기의 많은 시간을 게임으로 보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허상 속에 살았구나...'
아내는 새 집에 입주하면 TV를 하나 두자고 제의했지만,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짐작을 확신한 건 처가에 내려갔을 때다. 처가 거실에는 TV가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는 블랙홀에라도 빨려 들어간 듯 TV 화면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장모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박서방 절대 집에 TV 놓으면 안 되겠다~! 애네 둘이 하루 종일~ TV만 붙잡고 있겠다."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나의 기준은 최소 36개월까지 미디어 노출 자제하기. 그럼에도 힘들어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태블릿을 허용했고, 일정 시간 이하 시청이 규칙. (물론, 이 과정에서 내 동의는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생후 31개월인 현재, 미디어를 허락한 지 1년이 지났다. 아내가 잘 교육하고, 아이도 생각보다 잘 따라주고 있다.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만화 속 주인공인 자동차 장난감부터 찾지만, 책과 바깥 활동도 좋아한다. 요즘은 영상을 틀어줘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끄기도 한다.
어느 날 출근한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쏭이 일어나서 책부터 읽더라. 어젯밤에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읽어줬는데. 책 읽는 거 보니 힐링이었어."
아이 자체로도 행복이지만, 긍정적인 성장을 볼 때면 그동안의 인내가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처음 겪는 육아를 잘해보려 유튜브도 찾아보고 책도 읽지만,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인격체를 대하는 육아는 더하다. 앞으로도 예상 밖의 여러 난관이 있겠지만, 아이를 향한 사랑과 이 성공 경험은 난관을 해결하는 힘이 될 줄로 믿는다.
막연히 못하게 하는 방법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려주고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아이로 기르고 싶다. 온몸이 어는 추위에 아이는 집돌이가 되었다.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만화를 보고, 장난감을 갖고 놀고, 책을 보며 일과를 보낸다. 봄이 되면 함께 자연 관찰을 나갈 계획이다. 현실 세계에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