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단자(BLACK BELT)1.
어쩌면 이건 그저 나의 반성문일수도 있겠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며 나 스스로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며 내 지난 일들을 먼저 돌이켜보고 싶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머리가 컸다. 내 동생도 큰 편이다. 뭐, 어차피 같은 공장에서 나왔으니까. 그래서 그런가 조카 녀석도 남다르다.
그래서 그랬던가 어릴 적에 자주 얼굴로 넘어져서 지금도 얼굴에 상처가 남아 있다. 내가 들었던 신체를 이용한 별명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몇 개 있는데.
‘해가리는 머리’
‘츄파춥스’
뭐 이런 식이다.
머리가 크다 보니 또래 애들보다 더 커 보였고 어릴 적에는 한두 살 많은 형들도 쉽게 나를 대하지 못했다 한다. (어머니의 회고)
하지만 같이 놀다 보면 정체는 금방 탄로가 나게 되었다. 숨바꼭질을 하거나 오징어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술래가 되어 아이들을 쫓아다니기 바빴다.
정체가 드러나니 아이들 중에는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게 어린 나이에 꽤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10살쯤 되었을 때 태권도장을 보내 달라고 어머니에게 떼를 썼으니 말이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태권 도장에 보내주셨고 나는 열심히 도장을 드나들었다.
발차기도 배우고 품세도 배우고 대련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허리에는 빨간색과 검은색이 섞인 벨트가 묶여 있었다. 드디어 나를 보호해 줄 심벌이 생긴 것이다.
그 벨트를 받은 다음날 나는 체육관 이름이 적힌 체육복에 품띠를 메고 등교했다.
나를 심심할 때면 놀리던 친구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물론 만만했기에 장난을 치는 경우는 있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학교 다닐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6년 동안 같이 학교를 다니던 같은 마을 아이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중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는 나의 품띠 따위는 모르는 아이들 뿐이었다.
같은 나이라도 형과 누나가 있는 친구들이나, 나에 비해 좀 더 시내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나와는 다르게 많이 성숙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나이의 우리들은 동물의 세계처럼 힘의 서열이 정해지고 있었다. 영화에 나올법한 그런 스토리의 생활은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기 전 남자 중고등학교는 긴장감이 돌곤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런 서열 정리의 긴장 속에서 좀 거리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열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약한 편이었기에 오히려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적당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적당한 성적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같은 시기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나만 서울로 진학했다 한다.
한동안 이것도 나의 검은 벨트 중에 하나였다.
서울로 진학한 나는 또 나의 검은 벨트 따위는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동기들에게 선배들은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망의 외침이었던 것 같지만)
“우리 과는 20년 동안 여학우가 한 명도 입학하지 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여담으로 얘기하지만 나는 남자 중고등학교 출신의 공대생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강의실 뒷 문으로 들어갔을 때의 풍광을… 올 검은 패딩을 입은 녀석들 머리 위로 검은 기운이 가득했던 것을…
그렇게 나의 대학 생활은 시작했다. 하지만 절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솔직히 절망의 연속이라기보다는 인생의 갈림길을 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나의 운명은 입학식에서 한번 크게 바뀌었다.
정식 입학식이 끝나자 짧은 치마의 화려한 복장을 한 응원단이 등장했고 그 뒤로 밴드가 서 있었다.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밴드였다.
밴드 싱어는 올해도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으니 많은 참여 바란다고 안내를 했고, 이틑날부터 학교 전역에 신입생 모집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이튿날 지하에 있는 밴드 연습실을 찾아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찾아갔다.
태어나서 그렇게 강하게 끌려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나는 싱어파트로 오디션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실 악기를 다룰 줄도 몰랐지만 싱어가 멋있었기 때문이다.
오디션까지는 2주 이상 남았지만 입학식 때 연주를 했던 2학년 선배들은 자주 와서 얼굴을 비추는 게 당락에 크게 영향을 준다고 귀띔해 주었기에 나는 수업이 끝나면 새로 사귄 과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쾌쾌한 냄새가 나는 지하연습실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오디션 당일 많은 신입생들이 오디션에 참석했다. 당연히 반수 이상이 싱어 파트에 도전을 했고 그중 싱어로 3명이 1차 선발이 되었다. 오디션은 금요일에 있었고 발표는 그다음 주 월요일에 학생회관 앞에 대자보를 붙인다고 했다.
(삐삐도 없던 시절이니…)
주말 내내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다.
1학년 수업은 대부분 아침에 몰려 있었다. 공대건물을 가려면 학생회관을 지나쳐야 하는데 혹시나 내 이름이 없을까 두려워 멀리 돌아서 갔던 기억이 난다.
월요일 수업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자보가 붙어 있는 걸 보았다.
‘합격’
‘싱어 김ㅇㅇ 전ㅇ과’
나의 대학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매일 수업 전에 연습실에 들렸고 수업 후에는 선배들의 연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같이 합격한 친구들과 한자리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했을 때 곧 나도 선배들처럼 저런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1학년이 하는 거라고는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선배들의 연습이 끝나면 정리해 주고 선배들의 술자리가 있으면 집에 간다는 소리도 못하고 참석해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겨우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연속이었다.
나의 경쟁자 중 하나가 그런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 친구가 똑똑한 거였다. 내가 미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몇 주 안 되어 남은 한 명의 경쟁자도 그만두면서 나는 자동으로 이젠 내가 신입생으로 꾸린 팀의 싱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그리 쉽지 않더라.
선배들은 내가 싱어로서 끼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나에게 다른 악기 파트를 권유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악기를 잡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결국 여름 방학부터 나는 베이스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베이스 기타는 그 이후 15년간 나와 함께 했다.
잠깐 내가 속해 있던 밴드는 나름 히스토리가 있는 밴드였다. 가요제 수상도 여러 번 했었고 꽤 유명한 가수나 연주자들이 당시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종합예술인 선배나 농구 드라마 주제가를 부른 선배도 있었다. 그런 선배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멋진 연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은 정말 빛났다.
친구들은 그런 밴드에 속해 있는 나를 매우 부러워했고 다른 이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했었다. 시간은 흘러 2학년이 된 나는 학교와 밴드를 대표해서 많은 행사에 참석했고 선배들이 이룩한 이름 아래서 우리의 실력보다는 과분한 대우를 받았었다.
군대에 갈 시기가 다가오자 나는 군악대에 가고 싶었다. 이미 전공보다는 음악이 더 좋았기에 군대에서 나의 커리어를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군악대를 위한 준비도 하지 않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를 살리지도 못했다. 선배들의 노력으로 밴드에 주어진 검은띠는 밴드의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3학년 2학기가 시작하자 나는 더 이상 군대를 미룰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논산으로 입소하였다. 약 8주 훈련 기초훈련 후 나는 박격포 주특기를 받았다. 그리고 경기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는 군단에 배치를 받았다. 11월 그곳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짝 긴장한 나는 공대 강의실보다 더욱더 검은 기운이 가득한 곳에 어리바리하게 각 잡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또 신병교육대로 보내졌다.
2주 동안 피티복을 입고 이상한 훈련을 받았다. 주로 매달리고 뛰고 기고 뭐 이런 훈련이었다. 그렇게 나는 군단의 어느 부대에 배치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부대원들의 모자에는 하얀 무언가가 붙어 있었고 가슴에도 고양잇과 동물의 마크가 붙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키가 컸고 등치도 컸다. 머리도 길고. 나보다 훨씬.
나는 그곳에서 2년을 보냈다.
우물과 같은 생활로 나의 생각과 사고는 그들과 동기 되었고 선배들의 무용담은 어느새 내가 경험한 일들이 되었다. 뭔가 마크가 잔뜩 붙은 군복을 입고 외출이나 휴가를 나갈 때면 일반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다른 부대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이 그걸 알아봐 주는 것이 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사실 그 마크 중 일부는 실제 어떤 훈련을 수료하고 받아야 하는 마크지만 입대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게도 부대의 일원으로 미리 달아 준 것이었다. (나는 자대에 배치받은 지 7개월 만에 그 마크에 합당한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대에 대한 자부심이 커져 갔고 드디어 제대를 하게 되었다.
군대를 갔다 오자 세상에 못할 게 없어 보였다. 2년 동안의 규칙적인 생활로 몸은 튼튼해졌고 세뇌당한 나의 뇌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만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하얀 마크와 고양잇과 동물의 마크를 붙인 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고 나를 자랑스럽게 하던 검은띠는 나 스스로가 쟁취한 것이 아닌 그저 내가 속한 단체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복학한 이후에도 나는 음악을 계속했다. 다른 친구들은 복학 후 취직을 위해 진학을 위해 열심히 밀린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기타를 쳤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이 살았다.
그렇게 졸업을 맞이할 때쯤 IMF사태라는 것이 터졌다.
박찬호는 열심히 공을 던지고 박세리는 양말을 벗고 골프를 치며 양희은 아줌마의 상록수가 흘러나오던 그때 나는 음악을 더 배우기로 작정했다
시기도 시기지만 집안 형편상 음악을 위해 유학을 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기에 당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재즈아카데미라는 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음악 하려고 맘먹고 온 친구들이 대부분이라 정말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심한 곳이었다고 기억한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보습학원에서 중고생들에게 과학과 수학을 가르치면 1년 6개월을 보냈다.
재즈아카데미의 수료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재즈를 배울만한 곳이 없었기에 그곳에서 공부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정을 받는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학교 밴드 선배들의 인프라와 재즈아카데미라는 이름 덕분에 나는 조금 알려진 가수들의 백밴드에서 연주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선배들이 일이 많아 대타로 내가 간 것일 뿐이다.)
연주자의 생활은 정말 별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기에 음악을 좋아했지 경제적으로는 정말 힘든 나날이었다.
결국 나는 돈이 되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당시 유명한 나이트클럽에 출연하는 밴드의 베이스로 일하게 되었다. 월급을 주는 곳이었기에 어쩌다 들어오는 세션 자리보다는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밤낮이 바뀐 생활과 술이 썩는 곳의 생활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속해 있던 밴드도 그 동네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에게는 꽤 알려진 오래된 밴드였다. 지금은 나이트에서 라이브 밴드를 보기가 어렵지만 20년 전에는 강남 언저리에 꽤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였고 지금도 유명한 가수들이 그 밴드의 메인 싱어들이었다고 한다. (실제 나는 그들을 보질 못했다. 죽은 이도 있고 너무 유명해진 이들도 있어서)
4년을 넘게 한 밴드에서 연주했었다. 같은 업종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 밴드의 베이스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고, 유명한 밴드의 선배들과도 안면을 트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해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어는 선배의 배려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위대한 탄생의 공연은 정말 멋있었다. 거의 매일 밤이면 출근해야 하는 직업이었기에 다른 이들의 공연을 자주 볼 수 없었기에 그 공연은 너무 신선했고 대단했다. 지금도 단편적이지만 그때 모습이 떠오를 정도이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나는 내가 연주하는 클럽에 돌아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날따라 유독 리더형과 친분이 있는 연주자들이 많이 클럽에 왔다. 술이 한잔씩 들어가자 연주자들은 자신들도 연주하고 싶다고 즉흥 연주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리더형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 8군 1.5세대, 서울ㅇㅇ을 나온 젊은 세션맨들, 그리고 유명한 밴드의 멤버들이 즐겁게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른 이들의 연주를 느긋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내 마음 한편에서는 불편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