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의 친절은 생존이었고, 집에서의 무례는 안도였다

by Robin 임봉규

퇴근길, 현관문을 닫는 순간 묘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낮 동안 단정하게 유지하던 ‘사회적 가면’이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낯선 이의 부탁에는 기꺼이 웃음을 보이던 입술이,

“밥 먹었니?”라는 한마디에는

“나중에 먹을게. 지금 피곤해.”

라며 짧고 건조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달라지는지 스스로도 낯설어집니다.


문득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거친 얼굴을 내미는가입니다.


비겁한 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가 깨질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만 예의를 지킵니다.


회사에서의 정중함과 식당에서의 매너는

사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비용에 가깝습니다.

그 관계는 언제든 틀어질 수 있고,

그 순간 내가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집은 다릅니다.

쉽게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이 있습니다.

그 확신은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도 결국 나를 이해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의는 선택이 되고 감정은 여과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어른이 된 아이의 모습이 드러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가족은 우리 기억 속에서

조건 없는 수용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울어도, 떼를 써도, 결국 품어주던 관계입니다.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만 서면

어린 시절의 감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밖에서 억누르며 쌓아온 피로와 짜증이

가장 안전한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안전한 대상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 결과,

사랑하는 사람이

감정을 쏟아내는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가 반복됩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가장 오래 함께할 관계인데

가장 적은 예의를 쓰는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조심하면서,

가까운 사람에게는 쉽게 무너집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가까울수록 배려보다

오히려 ‘예의’가 필요합니다.

배려는 마음에서 나오지만,

예의는 의식적으로 지켜야 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거리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리를 채우는 말투와 표정으로 유지됩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하게 됩니다.

밖에서의 친절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면,

집에서의 태도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친절은 타인에게 베푸는 선택이 아니라,

내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