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까요

by Robin 임봉규


퇴직한 사람들 모임에 가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부분 공대 출신들인데, 골프 이야기보다 “요즘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이 더 자주 들립니다.


누군가는 자서전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회사 시절 프로젝트를 정리하며, 또 어떤 사람은 블로그에 사회 현상에 대한 생각을 기록합니다.

해외 수주전의 막전막후를 웹소설로 써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평생 마음속에 남아 있던 영어 발음에 대한 갈증을 책으로 정리해보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각자의 취미처럼 보이지만, 이 풍경에는 공통된 흐름이 있습니다.

사람은 일을 그만두면 쉬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미뤄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현역 시절 우리는 늘 말하며 살았습니다.

회의에서 말했고, 보고서로 말했고, 숫자와 일정으로 판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대부분은 조직의 언어였습니다.


개인의 생각과 감정, 망설임과 질문은 효율과 성과라는 기준 뒤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특히 해외 수주전 같은 현장은 철저히 결과로만 기록됩니다.

승패, 계약 금액, 조건과 일정이 남습니다.

하지만 실제 기억에 남는 것은 다른 장면들입니다.

밤늦은 호텔 방에서 다시 계산표를 수정하던 순간, 경쟁사의 제안을 듣고 전략을 바꾸던 시간, 통역이 잠시 멈춘 사이 흐르던 긴장 같은 것들입니다.

웹소설로 그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말은 결국 “그때의 진짜 이야기를 남겨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영어 발음 책을 쓰겠다는 사람의 마음도 비슷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거창한 목표라기보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던 개인적인 갈증을 한 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바쁠 때는 늘 뒤로 밀려 있던 작은 숙제를, 이제야 비로소 꺼내 보는 일입니다.


블로그를 선택한 사람들의 글쓰기 방식도 같은 흐름 위에 있습니다.

특정 주제를 깊이 연구하기보다, 그때그때 떠오른 궁금증과 사회를 보며 느낀 생각을 기록합니다.

완성된 결론을 남기기보다 생각이 움직이는 과정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생각해 보면 은퇴 후의 글쓰기는 새로운 취미라기보다 아주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그동안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살았고, 지금은 비로소 과정을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직함이 있을 때는 회사의 언어로 말했고, 이제는 자기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퇴한 사람들이 책을 쓰고, 소설을 구상하고, 블로그를 이어가는 모습은 특별한 장면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바깥을 향해 살았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은 결국 한 번쯤 이렇게 말해보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고민했다”고,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