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를 더할수록 뒤틀리는 언어

‘과잉’이 삼킨 한국어의 풍경

by Robin 임봉규



한국어는 예절의 언어입니다. 말 한마디에 관계와 위계, 태도와 거리감이 함께 담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조심하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더 공손하게, 조금이라도 더 높여 말하려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한국어는 자주 틀어집니다. 상대를 존중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언어의 규범과 논리를 앞지르는 이른바 ‘과잉 존대’의 장면이 반복됩니다.


가장 흔한 사례는 자기 가족에 대한 호칭입니다. 흔히 “저희 아버님”, “저희 어머님”이라는 표현을 예의 바른 말로 생각하지만, 이는 존대의 대상을 혼동한 결과입니다. 자기 가족을 남에게 말할 때 겸양의 태도는 필요하지만, 가족 구성원에게까지 존칭 ‘님’을 붙여 소개하는 것은 이중 높임에 해당합니다. 자기 가족은 원칙적으로 높이지 않으며, “아버지”,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표현이 “저희 남편”입니다. 이 표현은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화자 쪽 사람이나 집단을 낮추는 겸양어이므로 이론적으로는 성립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필요성입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까지 추가적인 겸양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며, 이미 화자는 자신을 낮춘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남편”이나 “제 남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확합니다. “저희 남편”은 틀린 표현이라기보다는 공손함을 필요 이상으로 덧붙인 관습적 표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가족을 넘어 공동체와 국가 개념에서도 나타납니다. 실제로 과거 한 정치인이 공식 발언에서 “저희 나라”라고 표현했다가, 국가는 낮추어 말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고 “우리나라”가 맞는 표현임을 해명해야 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겸양의 대상과 존중의 대상을 구분하지 못할 때, 공손함은 곧 부적절함으로 바뀝니다.


이 같은 과잉은 회사 내 직급 호칭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직급 뒤에 ‘님’을 붙이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장’, ‘차장’이라는 직함은 그 자체로 조직 내 역할과 책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존중을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직함을 그대로 부르는 행위는 지위를 깎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위를 정확히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언론사나 일부 비교적 수평적인 조직에서는 “부장”, “차장”처럼 직함만을 사용하는 문화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는 무례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적 존대를 걷어내고 업무상의 역할과 책임에 집중하기 위한 언어 선택입니다. 기사에서 “김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라고 쓰는 이유도 같습니다. 존중은 말끝의 ‘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직함이 지닌 권한과 책임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일반 사회에서는 직함 뒤에 ‘님’을 붙이는 방식이 관습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관습을 넘어선 중복 존대입니다. 직함에 이미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여기에 다시 존칭을 덧붙이고, 나아가 여러 직함을 겹쳐 사용하는 순간 언어는 경제성을 잃고 비대해집니다. 예의를 더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언어의 정확성을 해치는 지점입니다.


더 나아가 존대는 사람을 넘어 사물과 제도에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가격이 비싸십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와 같은 표현은 존대의 대상이 사람이 아닌 사물로 향한 사례입니다. 이는 공손함과 정확성을 혼동한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존대는 본래 사람을 향한 인격적 언어 장치입니다.


이 모든 현상의 배경에는 공통된 심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계가 강할수록, 관계가 불안할수록 언어를 더 화려하게 포장해야 한다는 강박이 언어 규범을 밀어냈습니다. 그 결과, 틀린 표현이 오히려 더 바른 말처럼 굳어지는 기묘한 풍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언어는 태도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태도는 과장이 아니라 정확성에서 드러납니다. 예의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무조건 말을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존중의 기준을 제자리에 놓는 일입니다. 예의는 더하는 기술이 아니라, 제자리를 지키는 문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