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안도가 지도가 되었을 때

가장 거친 바다 태평양에 '평화'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

by Robin 임봉규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 광활한 바다의 이름이 평화라는 사실은 언제나 묘한 울림을 줍니다. 태풍이 태어나고 쓰나미가 대륙을 향해 달리며 불의 고리가 둘러싼 이 격렬한 바다에 왜 가장 온화한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국 한 인간의 감정으로 이어집니다.


1520년 마젤란은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통과해 처음 마주한 바다를 스페인어로 Mar Pacífico(잔잔한 바다. 평화로운 바다 등) 라고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Pacific Ocean입니다. 수개월 동안 폭풍과 추위, 굶주림을 견딘 뒤에 맞이한 고요함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생존의 안도감이었습니다. 바람은 멈춰 있었고 파도는 낮았으며 수평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습니다. 이름은 바다의 물리적 성질이 아니라 항해자의 심박수를 기록한 언어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은 지구에서 가장 격렬한 바다입니다. 전 세계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지이며 지진의 대부분이 발생하는 불의 고리를 품고 있고 가장 깊은 해구들이 잠들어 있는 공간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평화와 가장 거리가 먼 바다입니다. 그럼에도 이름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름은 사실보다 오래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이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또 한 번의 해석이 이루어졌습니다. Pacific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라는 문제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선택이었습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난학자들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지리서를 받아들이면서 개념어를 한자로 정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Pacific의 의미를 직역하지 않고 동아시아적 질서 개념인 太平(태평)을 사용해 太平洋(태평양)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太平은 단순히 잔잔하다는 뜻이 아니라 태평성대처럼 질서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는 정치적이고 문명적인 단어입니다. 즉 자연의 상태를 설명한 번역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이상을 투영한 해석이었습니다. 이후 메이지 시대 지리 교과서와 지도에서 이 용어가 표준화되었고 청말 중국이 근대 학문 체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식 번역어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중국에서도 太平洋이 공식 명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 역시 이 한자어를 받아들여 오늘날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의 바다는 세 번의 해석을 거쳤습니다. 항해자의 감정이 스페인어가 되었고 그것이 영어 Pacific으로 굳어졌으며 다시 일본에서 太平洋이라는 문명적 언어로 재해석된 뒤 동아시아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바다의 이름이 자연이 아니라 감정과 번역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지명을 객관적인 분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번역된 기억입니다. 대서양이 신화를 품고 있다면 태평양은 감정과 번역이 겹쳐진 이름입니다. 지도는 공간의 정보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역사입니다.


태평양이 실제로 평화로웠던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마젤란에게는 그날 단 한 번 완벽하게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번역자들에게는 그 평화가 문명의 질서를 상징하는 단어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가장 거친 바다를 가장 안정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평화는 자연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부여한 해석이며 태평양은 감정과 번역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언어의 지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