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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Nov 07. 2015

나이트 오브 컵스

인생의 의미를 찾는 내면의 여행

2011년 이맘 때의 일이다. 중년의 아저씨 둘은 영화 데이트를 하였다. 상대는 내가 참 존경하고 좋아하는 형이었는데, 그 전까지의 만남은 주로 나의 푸념을 쏟아 놓는 술자리였다. 형은 술도 즐기지 않으면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깨도 두들겨 주었다. 나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다시 뭐든지 잘할 수 있을까 등의 넋두리였다. 어느 날은 그 지겨운 이야기를 듣는 술자리를 한결같은 표정으로 견뎌 주는 형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함께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이다.


선택한 영화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였다. 철학적인 내레이션과 우주의 장관, 조각조각 파편처럼 병치된 장면들. 이들의 조합은 독한 술처럼 내 몸속에 들어와 나를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하게 하였다. 그 상태에서 나는 어느 새 나의 내면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랑, 화해 등의 주제로 성찰이 계속되었다. 극장에서 나온 형과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술자리를 파할 때 그랬던 것처럼. 다른 것이 있다면 -나의 경우이겠지만- 취기에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사우나에서 땀을 쏟아 낸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그 빈속을 가족들로 채우고 싶었다. 사랑에 목이 말랐다.


테렌스 맬릭 감독의 신작 '나이트 오브 컵스'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의 데이트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 형을 생각하면, 수많았던 술자리보다 단 한 번의 영화 관람이 떠오른다. 그만큼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는 우리 두 중년의 사내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세상을 하루하루 임기응변으로 살아 내는 나에게 이번에도 '죽비소리'를 들려줄까? 기대감을 안고 영화를 보았다.


극의 서사는 더욱 단순했다. 성공한 작가 릭(크리스찬 베일 분)은 낸시(케이트 블란쳇 분)와 이혼했다. 그리고 유부녀인 연인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 분)와 만남을 가지고 있다. 위험한 여정에서 영혼을 구원해 줄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당장의 쾌락을 위해 사랑의 경험만을 즐기는 릭. 그는 원칙은 없고 상황만이 존재하는 자신의 삶에서 인생의 의미와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고 번민한다.


이와 같은 단순한 이야기는 타로카드의 상징적 의미들로 구성된 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각 장들은 아름답고, 황폐하고, 환락적인 장면들의 충돌로 채워져 있다. 장면들의 충돌에서 튕겨져 나온 나의 의식은 내면으로 향하면서 나의 무의식 속에 있던 내 생활의 파편들을 끄집어 냈다. 마치 타로카드 몇 장으로 인생을 이야기하듯이 영화의 장면들이 이루는 몽타주에서 내 삶의 민낯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사악하고 불순한 생각들, 나약하고 부끄러운 고민들,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싶은 비밀들이 마음속에서 울렁거렸다. 특히 영화 속 자연의 모습은 우주의 섭리라는 거대한 문맥 속에 나를 조그만 점 하나로 찍어 놓음으로써 스스로 겸손한 마음이 들게 하였다. 너무 복잡다단해서 어찌할 수 없다는 변명. 본능을 따르는 것이 나의 인생에 충실한 것이라는 위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만. 나의 교만함은 태초의 고요를 펼쳐놓은 듯한 자연의 풍광 앞에서 진지한 성찰을 다짐하고 있었다.


형과의 술자리도 그랬었다. 형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간간이 질문했다. 그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 나는 나의 내면과 오랜만에 진실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이 문제이며,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고민을 평소에는 잊고 살아가던 나는 형의 질문 앞에서 나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누군가 그런 술자리가 필요한 분이 있다면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다시 뭐든지 잘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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