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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Feb 20. 2023

다음 소희

그들의 ‘언 발’을 잡아줄 때


눈 / 한기팔


말 몇 마디 나누고 싶어서

이 세상 모든 간절한 것들

눈발이 되어 내린다.

담장을 넘을 때

목소리는 불려서 하늘은 어둡고

재가 되어 날리는 그 말

고요하고 고요해져서

그들의 말은 늘 하얗다.



소희는 물었다.

나 회사 그만두면 안 되냐고

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냐고...


누군가 이 질문에 답해 주었다면 그리고 소희의 마음을 들여다봤다면 소희는 지금 새봄을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소희의 질문은 재처럼 허공에 날리고 주변의 어른들은 침묵으로 고요해졌다. 소희의 간절한 한 마디들은 내려앉을 곳 없이 공포에 질려 하얗게 창백해졌다. 이처럼 햇볕도 들지 않는 곳에 빙판으로 남은 불편한 이야기를 정주리 감독은 <다음 소희>를 통해 드러낸다.



<다음 소희>는 2017년 1월 전주의 한 저수지에서 졸업을 앞둔 여고생이 시신으로 발견된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주인공 소희(김시은 분)는 술집에서 시비를 거는 남성 취객들에게도 당당히 맞설 만큼 씩씩한 인물이다. 소희는 ‘대기업’이라는 포장지로 실체를 가린 콜센터에서 ‘계약 해지 방어’ 일을 하며 갈등하고 좌절한다.


오직 숫자로만 인식되는 노동의 가치. 그 폭력적인 시스템 안에서 소희는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온갖 욕설과 성희롱에 노출되면서도 목표 달성을 위해 하나의 상품이라도 더 소개하려는 소희. 그 부당한 현실에 항변해 보지만 그럴수록 소희는 부조리한 자본의 카르텔의 위력을 실감하게 될 뿐이다.


현장 실습생을 착취하는 비리를 고발하는 팀장(심희섭 분)의 죽음 앞에 공포를 느끼고 그의 죽음을 은폐하려는 회사가 내민 각서에 서명하는 소희. 그녀도 결국 시스템에 굴복해 버렸다는 좌절감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현실과 타협한 듯 성난 기계처럼 일하고 목표 달성 1위의 성과를 올린다. 인센티브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면서. 하지만 회사는 퇴사의 우려 때문에 몇 달 후에나 인센티브를 지급한다며 소희의 양심의 대가마저 빼앗는다. 소희는 결국 깨닫는다. 회사의 굴레 안에서 자신에게 희망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손목을 그은 소희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졌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소희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부모님께 묻는다. “나 회사 그만두면 안 될까?” 그리고 침묵. 이윽고 소희는 말한다. 왜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냐고.


학교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소희는 묻는다. “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 하는지 알아요?” 또다시 침묵. 누구 하나 소희가 왜 팀장에게 주먹을 날렸는지, 무슨 일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지 위로의 한 마디를 들려주지 않았다. 한겨울 추위에 맨발로 방황하는 소희가 머물 곳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성이고 서성이다 차가운 물속으로 걸어내려 간 것이다.



맨발 / 도종환 


  새벽까지 풀풀 눈발이 날리고 있다 혹한이 저수지 전체를 가득 얼리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얼음 위에서 발그레한 맨발을 바장이던 청둥오리들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영혼들이 지상에는 많다 그도 어둠을 잔뜩 묻힌 날개를 퍼덕이며 남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야간열차의 속도에 몸을 파묻은 채 그의 방황도 소리치며 달려갔을 것이다 눈발처럼 떠도는 유목의 깃발을 들고 어둑새벽 플랫폼을 서성이다 날이 밝기도 전에 바다로 이어지는 비릿한 비탈길을 걸어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머물지 못하는 제 정신의 몇페이지를 싸안아다 파도처럼 바위에 던지며 울고 있을 것이다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그의 언 발을 잡아주지 못하였다 겨울에도 맨발인 그의 정신을 따뜻하게 만져주지 못하였다


  내 영혼의 손도 그의 것처럼 외롭고 차가워서 다만 눈발에 몸을 적시며 그가 떠난 찬 하늘을 오래 지켜보고 있다 북쪽 끝에서 내려오는 한파의 선단이 천천히 강 하류의 얼음 위에 닻을 내리고 있다.



시신으로 발견된 소희의 맨발을 응시하는 유진(배두나 분). 유진은 오랜 병환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현장으로 복귀한 형사이다. 개인의 일상에 지쳐서 다른 사람에겐 관심을 보일 여유조차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연습실을 찾아온 소희에게 무관심했다. 자신의 연습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못 참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랬던 그녀가 소희의 죽음에 감춰진 실상을 파헤치며 변모해 간다. 외롭고 차가웠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분노와 죄책감으로 데워져 또 다른 소희 격인 쭈니(정회린 분)와 태준(강현오 분)의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났다. 소희가 불쌍하고 소희에게 미안해서. 이 엄청난 죄악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눈물이 마를 때까지도 그 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은 아마도 ‘유진처럼이라도'가 아닐지. 주변의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들이 머물 곳이 되어 주라고. 그 정도는 숫자의 위력에 짓눌려 사는 우리들이라도 해 볼 수 있지 않냐고. 그런 우리가 있다면 ‘다음 소희’의 희생은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우리가 내민 따뜻한 손이 그런 희망을 갖고 있음을 영화는 한 장면으로 보여 준다.

돌멩이처럼 단단해 보이던 태준의 한 마디,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물.


이제 우리가 그들의 언 발을 잡아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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