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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은 왜 배를 돌렸을까?

기예르모 델 토로, <프랑켄슈타인>

by 박재우

파멸의 목격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북극의 얼어붙은 바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그곳에서 시작한다. 얼음에 갇힌 탐험선, 그 거대한 관(棺)과도 같은 절망적인 공간의 첫 번째 목격자는 캡틴 앤더슨(라르스 미켈슨 분)이다.


그는 단순한 관객이나 재판관이 아니다. 그는 이야기의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 분)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선원들의 생명 보호라는 ‘관계’보다 북극 탐험이라는 ‘목적’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우선시하는 그는, 빅터의 또 다른 모습이자 ‘공범’이다.


영화의 러닝타임 150분은, 바로 이 ‘목적에 사로잡힌 괴물’ 앤더슨 앞에서 펼쳐지는 빅터와 크리처(제이컵 엘로디 분)의 처절한 자기 고백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목격한 앤더슨은 “집으로 돌아간다”라고 선언하며 키를 돌린다. 그가 키를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나쁜 목적’과 ‘좋은 관계’의 단순한 대립에 있지 않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좌절된 관계(양육의 부재)’가 어떻게 ‘목적’이라는 괴물을 낳는지, 그 끔찍한 악순환의 공식을 추적한다. 앤더슨의 변심은, 이 파멸의 공식을 눈앞에서 목도한 자의 응답이다.




빅터의 증언: 좌절된 관계가 낳은 ‘목적'


앤더슨 선장이 들은 첫 번째 증언은, ‘관계의 실패’가 어떻게 ‘파괴적인 목적’을 탄생시켰는지에 대한 빅터의 고백이다.


빅터는 아버지 레오폴드(찰스 댄스 분)의 엄격하고 압제적인 세계에서 사랑받지 못한 채 결핍 속에 자랐다. 빅터가 평생 갈구한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인정이었지만 그가 돌려받은 것은 차가운 외면뿐이었다. 그의 모든 집착은 아버지의 세계에 진입하고, 나아가 그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의 결과로 크리처가 창조되었다. 이는 원작 소설의 ‘과학적 오만’이라기보다는, 좌절된 아들의 비뚤어진 ‘목적’이다. 아버지를 뛰어넘어 ‘신’이 되려는 목적인 것이다.


이 ‘목적’에 중독된 남성들의 세계에서 여성은 희생양이 된다. 빅터의 세계는 헨리히 할랜더(크리스토프 발츠 분) 같은 인물로 채워진다. 그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매독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생명 연장’이라는 절박한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빅터의 광기 어린 실험에 모든 것을 건다.


엘리자베스(미아 고스 분)는 이 남성들의 목적에 갇힌 희생양이다. 감독이 직접 밝혔듯, 그녀가 “이상하고 아름답지만 의지가 없는 불쌍한 존재”라며 갇힌 나비에 눈물짓는 장면은, 빅터의 세계에 갇혀버린 그녀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는 순간이다.


감독은 배우 미아 고스에게 빅터의 어머니 ‘클레어’와 ‘엘리자베스’라는 1인 2역을 맡겼다. 이는 빅터의 집착이 죽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서, 살아있는 엘리자베스를 향한 뒤틀린 소유욕으로 이어졌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빅터는 어머니를 닮은 ‘대체재’를 소유하려 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처럼 갇힌 존재인 크리처에게 연민을 느끼고, 빅터의 어머니가 그에게 그랬듯 크리처에게 정을 준다. 하지만 그녀는 이 ‘관계’를 맺으려다 ‘목적’에 사로잡힌 빅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이는 ‘관계에 실패한 괴물(빅터)’이 또 다른 ‘관계를 맺으려던 존재(엘리자베스)’를 파멸시키는 순간이다.




크리처의 증언: 목적이 되어버린 ‘관계’


영화 중반, 감독은 크리처의 목소리와 지성을 복원시킨다. 이는 1931년 제임스 웨일의 고전 영화 이래로 ‘말 못 하는 야수’로 그려진 괴물에게 오랫동안 빼앗겼던 원작 소설의 지성을 되돌려주는 행위다.


앤더슨은 두 번째 고백을 듣는다. 크리처의 절규 역시 빅터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바로 아버지(창조주)로부터 ‘관계’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그는 빅터와 완벽한 거울상이다. 둘 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같은 상처를 가졌다. 맹인 노인(데이비드 브래들리 분)과의 만남은 이 비극을 치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가능성의 순간이다.


가족들이 떠나간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진 맹인 노인. 그는 크리처와 가장 깊이 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눈이 멀었기에 편견 없이 크리처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크리처에게 단지 언어뿐만 아니라, 음악과 이성, 그리고 ‘관계의 기쁨’을 가르치며 “너는 괴물이 아니다”라고 존재 가치를 인정해 준다.


크리처는 이 따뜻한 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다. 그는 몰래 땔감을 마련하고, 울타리를 수리하며, 심지어 늑대로부터 노인의 가족을 지켜내며 보답하려 한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뜬 가족들이 돌아오자 이 모든 관계는 파괴된다. 그들은 크리처의 모든 선행(쓸모)을 그의 끔찍한 외모(규격) 앞에서 무시한다. 그들은 그를 ‘괴물’로 규정하고 배척한다. 이 순간, 크리처의 ‘관계’를 향한 순수한 열망은 ‘복수’라는 파괴적인 ‘목적’으로 변질된다. 빅터와 크리처. 둘 다 ‘좌절된 관계가 낳은 괴물’이라는 점에서 정확히 똑같은 존재다.




감독의 이상, 그리고 우리의 현실


북극의 얼음 위, 앤더슨 선장은 이 끔찍하게 닮은 두 존재의 비극을 모두 목격했다. 그는 ‘목적 지향적인 괴물’ 빅터가 어떤 파멸을 맞이하는지 보았다. 그것은 앤더슨 자신의 미래였다.


물론, 감독은 단지 이 절망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크리처는 마지막 힘으로 배를 밀어내 ‘관계(선원들)’를 구원한다. 감독은 이 ‘어른을 위한 잔혹 동화’를 통해 ‘용서와 화해’라는 이상적인 메시지를 관객에게 던진다.


이것이야말로 감독이 작품 인생을 통해 숙원했던 일이다. 그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그랬듯, 소외된 존재에게 깊은 연민을 보낸다. <피노키오>에서처럼 불완전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판의 미로>의 비달 대위처럼 진짜 괴물은 크리처가 아니라 빅터와 앤더슨 같은 ‘목적에 사로잡힌 인간’임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괴물에게 ‘목소리’와 ‘지성’을 되돌려줌으로써 그는 괴물을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닌, 용서하고 구원하는 주체로 격상시켰다. 이것이 감독이 앤더슨의 변심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 한 ‘숭고한 메시지’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나’의 시선으로 볼 때, 앤더슨 선장의 마지막 선택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것은 감독의 이상적인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인 ‘깨달음’이라기보다, 그저 ‘공포’를 느낀 결과다. 자신과 똑같은 집착을 가졌던 빅터의 얼어붙은 최후를 보고 자신의 목적이 가져올 파멸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의 변심은 숭고한 ‘구원’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포기’이며 ‘후퇴’다. 그는 목적의 지옥을 목격한 뒤, 그저 살아남기를 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화려하지만 음울한 분위기와 더 어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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