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엔젤이거나, 우리의 괴물이거나

연상호, <얼굴>

by 박재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흔히 “눈이 먼다”라고 표현한다. 이 관용구는 시각적 판단이 마비된 상태를 뜻하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랑의 본질이 시각 너머의 영역에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 ‘보지 못하는 남자’와 ‘보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연상호 감독의 <얼굴>(2025) 속 ‘임영규(권해효 / 박정민 분)’와 해리 클레븐 감독의 <나의 엔젤>(2016) 속 ‘마들렌(플뢰르 제프리어 분)’이다.


두 주인공은 모두 시각장애인이며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대상과 사랑에 빠진다. 설정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지만 두 영화가 도달하는 지점은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극명하게 갈린다. <나의 엔젤>이 오직 감각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사랑의 승리’를 노래한다면 <얼굴>은 타인의 시선에 종속된 사랑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 보여주는 서늘한 잔혹극이다.



<나의 엔젤>: 오직 나만의 감각으로 쌓아 올린 존재


해리 클레븐의 <나의 엔젤>은 ‘사랑은 존재를 감각하는 행위’라는 명제를 아름답게 증명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 마들렌에게 투명인간 소년 엔젤의 ‘보이지 않음’은 결핍이 아니다. 그녀는 시각이라는 지배적 감각 대신 청각, 후각, 촉각을 동원해 엔젤을 ‘본다’. 그녀가 느끼는 온기와 체취는 눈으로 확인하는 외모보다 훨씬 선명하게 엔젤의 실존을 증명한다.


마들렌에게 사랑은 상대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는 창조적 행위다. 세상 사람들에게 엔젤은 ‘무(無)’이지만 마들렌이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유(有)’가 된다. 그녀는 세상이 규정한 시각적 틀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주관적 체험만으로 상대를 긍정했다. 훗날 시력을 회복한 뒤에도 그녀가 “당신을 보기 위해 눈을 감겠다”고 선언한 것은, 세상의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감각적 진실을 지키려는 숭고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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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타인의 혀끝에서 태어난 괴물


반면 연상호의 <얼굴>은 이 공식을 지독하게 비튼다. 1970년대, 전각(篆刻) 장인 임영규 역시 아내 정영희(신현빈 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초기에는 그 또한 마들렌처럼 아내의 고운 목소리와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확신했다. 그러나 영규의 세계는 ‘세상의 소음’이 개입하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그래도 심성은 곱지? 얼굴은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술자리에서 친구가 던진 위로를 가장한 폭력은 영규가 쌓아 올린 감각의 성을 오염시킨다. 평생 타인의 이름을 새겨 그 존재를 증명해 온 전각 장인이, 정작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내라는 존재는 친구의 비루한 문장에 의지해 지워 버린 것이다. 마들렌이 자신의 감각을 믿고 세상에 저항했다면 영규는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고 타인의 시선에 굴복한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아내의 온기보다 남들이 내뱉는 ‘추함’이라는 평가를 더 신뢰했고, 결국 자신의 손으로 새겨온 사랑의 실존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타인의 시선이 지배하는 세계


결국 영규가 아내를 살해한 것은 시력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남들의 눈’으로 아내를 보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존재 자체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위치와 ‘번듯한 가장’이라는 이미지를 갈구했다. 공동체의 평판이 생존과 직결되었던 70년대의 폐쇄적 환경은 영규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배양액이 되었다. 세상이 그녀를 괴물로 규정하자, 그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명목하에 그녀를 지워버리는 파멸의 길을 선택한다.


영화의 마지막 반전, 즉 정영희의 얼굴이 사실은 지극히 평범했다는 사실은 영규의 비극을 완성하는 방점이다. 그가 마들렌과 같은 용기를 가졌더라면 자신이 매일 밤 만졌던 아내의 얼굴과 들었던 목소리만을 믿었더라면 정영희는 그에게 영원히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연상호 감독이 임영규를 통해 보여주는 비극의 핵심은 ‘인식의 주체성 상실’이다. 이 지독한 우화는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도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감동하는지 스스로 정의하기보다 정교하게 설계된 사회적 기준과 타인의 평가에 나의 감각을 손쉽게 위탁하곤 한다.


결국 <얼굴>이 비추는 것은 1970년대의 영규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서 고유한 감각을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타인의 욕망이라는 렌즈로 대상을 재단하는 한, 우리는 언제든 소중한 이를 괴물로 착각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그 존재를 지워 버리는 제2의 임영규가 될 수 있다.


<얼굴>은 묻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눈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이 만들어낸 괴물을 혐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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