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는 나름대로 말귀 밝다는 소릴 듣고 삽니다. 얽힌 실타래 같은 대화 속에서도 금방 실마리를 찾아내곤 하니까요. 문제의 핵심을 짚고 해결책을 내놓는 일에는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일터에서 익힌 빠릿빠릿한 눈치라면 집에서도 가족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잘 드는 칼 한 자루만 있으면 어떤 엉킨 매듭도 끊어낼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서툰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저는 자꾸만 길을 잃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슬쩍 한마디 보태면 거실에는 이내 서늘한 정적이 흐릅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꼭 저러더라.” 딸아이의 한마디에 머쓱해진 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자리를 피합니다. 분명 똑같은 한국말인데 제가 참여하는 순간 대화의 가락은 툭툭 끊기고 맙니다. 저는 그저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인데 제 말은 왜 번번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겉도는 걸까요.
얼마 전, 인공지능이 왜 한국어를 유독 어려워하는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더군요. 인공지능에게는 ‘눈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말은 주어나 목적어를 생략해도 상황으로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맥락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기계는 철저히 적힌 글자 그대로만 읽습니다. 말속에 담긴 결을 읽지 못하는 기계는 제멋대로 부족한 정보를 채워 넣다가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공학자들은 이를 ‘환각’이라 부른다는데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가족과 대화를 나눌 때의 제 모습이 딱 그 환각에 빠진 인공지능 같았습니다. 가족이 지난 몇 달간 쌓아온 일상의 사소함, 아이의 말 못 할 고민, 아내의 지친 기색 같은 ‘행간’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앙상한 단어 몇 개만 붙잡고 결론부터 내렸으니 그들에게 제가 얼마나 생뚱맞은 이방인으로 보였을까요. 저는 가족의 풍성한 마음을 건조한 ‘회사어’로 멋대로 번역하며 도리어 그들의 소중한 대화를 망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인공지능이라는 이방인은 우리가 정확한 좌표를 찍어줄 때만 길을 잃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족은 기계가 아니지요. 오히려 제가 그들의 좌표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눈치’는 타고난 센스가 아니라 상대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차곡차곡 쌓아온 정성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맥락이 거세된 대화에 해결책부터 던지는 건, 상대의 마음을 함부로 깎아내는 무모한 오지랖일 뿐입니다.
다시 거실로 나가봐야겠습니다. “내 말이 맞는데 왜 안 들어줘?”라고 서운해하는 대신 그저 가족들이 마음 놓고 머물다 갈 수 있는 고요한 배경이 되려 합니다. 그 풍경 안에서 아이의 풀 죽은 어깨와 아내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가만히 지켜보며 그간 놓쳤던 일상의 데이터들을 정성껏 읽어낼 생각입니다. 말로 채울 수 없는 그 틈을 응시하며 상대의 맥락을 새로이 학습하다 보면 저도 우리 집이라는 따뜻한 세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