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A. 데이비스, <가수들>
MBC 라디오의 장수 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를 들을 때면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에헤야~" 하고 터져 나오는 할머니의 투박한 민요 가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에는 뙤약볕 아래 굽은 등과 땀방울 맺힌 이마, 그리고 그 너머의 고단한 일상이 영화 장면처럼 아련하게 그려진다. 소리라는 최소한의 단서가 상상력을 자극해 시각적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샘 A. 데이비스 감독의 단편 <가수들>(The Singers)은 바로 그 '귀로 보던 영화적 체험'을 스크린 위에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 작품이다.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디지털 플랫폼에 올라온 이 18분짜리 짧은 단편은 역설적으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심장을 두드린다. 가창자들의 애달픈 사연이 켜켜이 쌓인 프레임들을 보고 있으면 18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들의 전 생애를 훑는 장편 영화의 서사가 풍성하게 채워지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오토튠의 소음에서 '삶의 광장'으로
우리는 지금 화려한 사운드와 정교한 오토튠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과잉된 기교에 가려 가사 한 줄조차 가슴에 닿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가수들>은 그 답답함을 뚫고 우리를 확 트인 '삶의 광장'으로 인도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 이반 투르게네프의 1850년 단편 소설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영화는, 미국의 낡은 선술집에서 벌어지는 투박한 노래 시합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소리의 원형'을 복원한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가짜'를 걷어냄으로써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감독은 매끈하게 훈련된 전문 배우 대신에 삶의 풍파를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웃들을 캐스팅했다. 뉴욕 지하철역에서 무려 38년 동안 행인들을 향해 노래하며 삶을 지탱해 온 버스커 마이크 영(Mike Yung)이 중심을 잡고,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 출신이지만 여전히 무대 공포증과 싸우는 주다 켈리(Judah Kelly)가 그와 호흡을 맞춘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속에 등장하던 할머니들의 노래가 연기가 아니었듯, 마이크 영의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지하철역의 냉기와 소음 속에서 견뎌온 세월 그 자체다.
필름의 입자가 복원해 낸 인생의 굴곡
감독은 요즘 흔한 디지털 카메라 대신 35mm 필름을 고집했다.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속에서 15초짜리 숏폼 영상으로 소비되고 사라지던 이 평범한 사람들을 영화관의 거대한 스크린에 영광스럽게 투사한 것이다. 감독은 이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주인공으로서의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필름 특유의 따뜻하고도 거친 입자는 술집 안의 자욱한 담배 연기와 가창자들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을 정직하게 현상해 낸다. 화면비 또한 옛날 TV처럼 답답한 4:3 비율을 선택했는데 이는 관객이 비좁은 술집 테이블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밀착감을 준다. 모든 노래는 현장에서 라이브로 녹음되어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나 거친 숨소리, 잔 부딪히는 소리까지 섞여 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묻혀 가사조차 선명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 뭉개진 소리들이야말로 세공된 팝 음악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날것의 물성'이자 생명력이다.
침묵의 장벽을 허무는 '소외된 자'들의 연대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낡은 술집에 모여 각자의 외로움을 삭이던 남자들이 100달러와 맥주 한 묶음을 걸고 노래 시합을 벌인다. 거친 문신과 덥수룩한 수염 뒤에 숨겨져 있던 슬픔과 후회가 노래를 타고 흐를 때 술집은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닌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공간이 된다.
특히 주다 켈리가 연기한 캐릭터가 남들 앞에 서기 두려워 화장실 푸른 타일 벽에 기대어 혼자 노래를 연습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좁은 화장실 안에 울려 퍼지는 그 청아한 목소리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내면을 대변하는 듯하다. 노래 실력의 우열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노래가 끝났을 때 돌아오는 깊은 침묵과 짧은 박수는 "우리가 여기 살아있다"는 존재의 증명이자 서로를 향한 따뜻한 위로가 된다.
마지막 음표가 남긴 묵직한 구원
영화는 오페라 아리아의 고음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가차 없이 화면을 지우며 끝이 난다. 누가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찰나의 멜로디가 그들의 남루한 인생을 잠시나마 환하게 밝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소리가 관객인 우리의 마음속에 한 편의 거대한 서사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우리 민초들의 삶을 기록했듯, <가수들>은 절망 속에서도 노래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 정신을 기록한다. 18분은 우리가 넷플릭스에서 무엇을 볼까 고민하며 무의미하게 허비할 수도 있는 짧은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을 <가수들>에 투자한다면 당신의 하루를 지탱할 단단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친 하루 끝에 넷플릭스를 켰다면, 잠시만 스크롤을 멈추고 이 비루한 생의 절규가 건네는 정직한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길 바란다. 그것이 당신의 오늘을 구원할 가장 확실한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