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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강원도 사북사건 그리고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도담삼봉을 지나면서 우리는 여행 첫째 날의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가기로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에서 날씨는 결정적 변수다. 다행히 나머지 이틀간 날씨는 맑은 것으로 예보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계속 움직인 우리는 빨리 숙소로 가서 편하게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고, 다른 친구들은 빨리 술을 먹고 싶었다는 게 맞는 말인 듯했다. 그것은 그들이 숙소로 가서 그날 밤 마신 술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평소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술자리가 생겨도 겨우 맥주나 홀짝거리는 나는 그들이 마시는 음주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사북에 들어섰을 때 나는 먼저 1980년 4월에 벌어졌던 ‘사북사태’를 떠올렸다. 사북에는 예상치않게 건물들이 서 있었고, 좁은도로에 자동차들도 꽤 많이 보였다.


“사북이 시야, 읍이야, 리야?”

“사북은 읍에 속하지.”

이 지역의 행정을 알지 못하는 나의 엉뚱한 질문에 혁국이 대답했다.


자동차 안에서 멀건히 사북 거리를 바라보던 나는 아주 오래전 뉴스를 떠올렸다. 신문 1면 톱기사로 대서특필되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을 때 국민을 놀라게 했던 사북사태. 뉴스는 소요를 일으킨 무도하고 폭력적인 광부들이 사북을 점령하여 민주질서를 파괴하고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북사건 또는 사북탄광노동항쟁은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반노동자적 어용노조와 소폭 임금인상에 항의하여 광부들이 일으킨 항쟁이었다. 동원탄좌는 전국 채탄량의 9%, 하청 탄광까지 합하면 11%를 차지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그러나 탄광의 노동 상황은 매우 열악해서 갱도 매몰사고가 빈번했고, 진폐증에 시달리는 광부가 많았으며, 임금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월평균 15만 5천 원이었다.


전과자와 불량배 출신들로 만들어진 어용노조는 사측의 입맛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광부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4월 16일 광부들은 노사분규를 시작하면서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했는데, 사측은 이를 묵살하고 경찰을 개입시켰다. 4월 21일까지 사태가 악화되면서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6천여 명은 시위를 벌였으며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더욱 흥분한 광부들은 그날부터 24일까지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24일 노사정은 합의에 도달했고 사태는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했으나, 당시 계엄사령부는 사건 관련자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여기서 고문과 구타, 성고문 등이 잇따랐고, 억지 짜 맞추기 수사가 이뤄졌다.


사북사건은 5.18 광주항쟁,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월 노동자대투쟁의 선도자 역할을 했다. 70년대까지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석탄 사업은 80년대 들어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연탄 소비량도 급감했다.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영세 탄광들은 폐광되었고 사북광업소는 2004년 10월 문을 닫았다.



2.


우리는 바로 그 사북사건의 현장에서 자게 되었다.

숙소로 들어간 후 베란다로 나가서 바라본 사북읍 시가지는 온통 하얀 밤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밤안개를 보고 있으려니,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오래도록 눈에 남은 장면은 음울한 회색빛 사북 거리였다. 박중훈이 심혜진을 오토바이 뒤에 태운 채 매우 춥고 음침해 보이는 사북 거리를 달리던 모습. 그러니까 사북은 내 머릿속에 춥고 어둡고 음침하고 좁은 시골 탄광촌이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기도 어려운 시골 사북 거리와 막장 탄광 모습까지.


박광수 감독의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은 사북을 배경으로 노동문제와 멜로를 묘하게 뒤섞은 영화이며, 1990년 발표 당시 큰 호평을 받았다. 박 감독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나 ‘이재수의 난’도 감독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이 그의 최고 수작으로 꼽힌다. 1990년 영화라 화질이 우수하지는 않고 어딘가 촌스러워 보이지만, 영화 자체는 매우 우수하니까 아직 안 본 사람들에게 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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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wOij54V6kDI (Trailer 5:16)


사북 연탄공장 사장의 아들인 성철(박중훈)과 티켓다방에서 커피를 배달하는 영숙(심혜진), 그리고 운동권에 있다가 그 거리로 도피해 온 기영(문성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역 유지로서 폭군 같은 성철에게 '티켓'이나 파는 영숙은 사북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도시 엘리트 스타일의 기영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기영의 방을 찾아온 영숙은 기영에게 자신의 일과 근로계약 상황을 설명하면서 기영에 대한 아련한 감정을 드러낸다.

“내 직업이 맘에 안 들죠?”

“제 직업은 맘에 들어요?”

“하기사 탄돌이에 차순이면 그리 꿀릴 것도 없지.”

영숙이 기영에게 호감을 보이면서 자조적으로 서로의 직업을 비교하는 대사이다.


“지금 다방에 전화해서 나 티켓 좀 끊어 줄래요?”

“하루 쉬면 월급에서 제하든지… 돈으로 메꿔야 하니까 우리는 시간이 돈이예요.”

“친구 같아서 하는 얘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그럼 날 친구라고 생각해요.”

“에…”

“그럼 날 좋아하는 거예요?”

“...”

“거짓말.”


우정인지 사랑인지 연민인지 알기 어렵다. 그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흐를까.

기영에게 마음이 갈수록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등감이랄까 부끄러움이랄까 하는 감정이 자신을 압도한다. 기영에게 사랑에 빠진 영숙은 마침내 티켓을 끊지 않겠다고 결정한다. 그러나 그녀를 괴롭히는 성철에게 마지막으로 티켓을 끊으러 갔던 영숙은 기어이 성철을 살인하면서 좌절한다.


박광수 감독은 기영을 통해 사변적인 지식인의 운동이 사북 탄광촌 민중의 투쟁과 어떤 괴리감이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던 듯하다. 원래 영화에는 기영의 과거를 비추면서 광주항쟁 부분도 들어갔지만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은 오늘의 어둠에 절망하지만

보다 찬란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


영화배우들을 본다면, 박중훈과 심혜진과 문성근의 아련한 리즈 시절 이야기다.

이 영화를 해외 영화제에 출품할 때 영어 제목은 ‘검은 공화국’(Black Republic)이었다. 탄광과 폐광이 어우러진 사북과 고한의 모습,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박광수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 때 연출부에 있었던 이창동, 이현승, 여균동, 김성수, 허진호 등은 모두 우수한 감독으로 데뷔했다.



3.


우리의 숙소는 정선군 사북읍에 있는 하이캐슬리조트다.

매우 고급 호텔 또는 숙박시설과 같다.


내가 숙박시설이라고 하는 것을 한국에서는 ‘콘도’라고 부르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호텔이라고 하면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시설이 없고 주로 침대좌 화장실이 있는, 흔히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만 이 ‘콘도’는 다르다. 비록 부엌시설은 매우 작게 꾸며졌지만 일반 아파트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다 ‘리조트’라는 이름이 붙으면 일반적으로 유명 관광지에 있게 되고 고급시설임을 표시한다. 실제로 하이리조트는 고급 시설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이틀밤을 자게 된다. 내가 혁국과 여행을 다니면서 모텔이 아니라 리조트 호텔에서 자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를 따라가면 항상 뭔가 퀴퀴하고 음침해 보이는 모텔로 들어가서 잤는데, 이번에는 재관이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예약했다면서 이렇게 근사한 리조트를 숙소로 잡았다.


방이 두 개이고 거실과 미니 주방이 있다. 욕실도 두 개이고 이불도 넉넉했다. 큰 방에서는 혁국과 재관이 한 침대에서 자고, 작은 방에서는 상국이 혼자 자고, 나는 거실에서 이불을 펴고 자기로 했다. 상국과 둘이 자기에는 방이 조금 좁았기 때문이다.


재관이 워낙에 통닭을 좋아해서 우리는 숙소로 가는 도중에 ‘옛날통닭’을 주문했다. 그와 아울러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맥주와 소주를 ‘잔뜩’ 샀다. ‘잔뜩’이라는 단어는 정말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안주로 과자도 많이 샀다. 그야말로 저 많은 것을 어떻게 다 마시고 먹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날 밤 모두 없어졌기 때문이다.


통닭 두 마리가 사라지고 십여 개의 맥주 캔이 비워졌다. 내가 맥주 한 캔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동안 엄청난 양의 주류가 매우 짧은 순간에 저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마시고 나서도 잠을 잘 잘 수 있다면 아주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 마신 후에도 그들은 다음날 아침이면 아주 말짱했다. 수십 년간 술로 단련된 그들이 내 눈에는 경이로워 보인다.


언제나처럼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난 혁국은 거실로 나와서 창문을 열고 사북 시내를 바라보았다. 나도 일어나서 보았더니 아침 안개가 여전히 읍내 상공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갰고 점차 읍내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드디어 둘째 날 아침, 리조트 호텔에서 나온 우리는 조식을 위해 사북 시내로 내려갔다.

간밤에 마신 술이 과해서 그런지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빵과 커피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그렇게 흔한 빵집과 카페가 사북 시내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조사까지 해서 우리는 빵집을 찾아갔고 기어이 빵을 먹고 커피를 샀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는 여행 둘째 날, 강원도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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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AOShEUn0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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