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아주 오래전에 단양에 온 적이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겨울이었다. 교회친구들과 어딘가로 여행을 가자고 해서 갔던 곳이 겨우 단양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그렇게 친하다고 했지만 교회친구들과 그렇게 2박 3일로 여행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필 영하 20도를 헤아리는 날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지만 우리는 배낭을 메고 버스를 타고 단양으로 향했다. 날이 너무 추워서 한강이 얼어붙었던 날이다. 희고 푸른얼음으로 뒤덮인 강 위에 도담삼봉이 있었다. 관광객이라곤 우리 말고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꽁꽁 얼은 강을 걸어서 건너갔으며, 도담삼봉 장군봉에 있는 정자에서 사진을 찍었다. 정자 밑에서 마치 정자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날 밤 우리는 어느 허름한 여인숙 단칸방에서 숙박했다. 온종일 배낭을 메고 걷고 버스를 타고 다녔으므로 매우 춥고 고단한 여행이었지만 열여덟 살 푸른 나이에 그것이 무슨 힘든 일이랴.
배낭에 가지고 갔던 코펠과 버너로 찬바람 부는 마당에서 저녁을 해 먹었다. 아마 카레라이스를 먹었을 것이다. 그때는 놀러 가기만 하면 석유가 든 버너를 켜고 으레 김치찌개나 감자찌개 아니면 카레라이스를 해 먹었으니까. 좁고 추운 방 하나에서 다섯 명이 끼어서 잤다. 다음날 아침에 씻으려고 했더니 여인숙 주인은 뜨거운 물이 없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가 어리다고 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뜨거운 물을 이미 다 사용해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결국 마당에서 찬 물로 세수하고 아침까지 해 먹었는데, 문제는 그 추운 날 아침에 내가 설거지 당번이었다는 것이다. 여인숙 마당에서 찬 물로 설거지를 하는데, 영하 20도의 추위로 인해 손가락이 코펠에 자꾸만 들러붙었다.
그렇게 고생하고 나와서, 단양에 더 볼 것이 없나 보다, 하면서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고 논의했다. 여행 정보도 거의 없었고 자동차도 없고 돈도 모자랐으니 우리의 여정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도담삼봉 말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미리 계획한 것도 없었다. 그저 다섯 명이 함께 여행한다는 사실만으로 좋았으니까.
우리는 엉뚱하게도 친구들 중 한 명의 고향인 목포로 가기로 했다. 완행열차를 타는 재미가 있다고 하면서. 목포가 고향인 친구 말고는, 전라남도까지, 그중에서도 끝에 있는 목포까지 갔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차를 타는 재미로 가기는 했지만 그날 낮에 목포에 도착한 우리는 딱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목포는 매우 황량해 보였다. 그곳이 고향인 친구는 목포에서 유달산이 유명하다고 했다. 그 한 마디를 듣고 우리는 유달산으로 갔다. 그 추운 날, 배낭을 메고 산을 올라가면서 왜 이 추위에 목포까지 와서 유달산을 올라가고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겨우 산에서 내려온 후에는 우연히 친구의 고향 선배라는 남자를 만났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작자는 우리에게 반갑다면서 다짜고짜 "고향 후배 친구들이 왔는데 술을 사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식당도 아닌 논 옆 길에 서서 막거리와 닭발을 먹자고 했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가운데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강하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가 사준다고 해서 얻어먹기는 했는데, 너무 추워서 덜덜 떨면서 막거리 한 잔 놓고 닭발을 씹었던 것은 확실하다.
닭발의 공포를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아무리 아무리 씹어도 입 안에서 닭발 조각은 잘리지 않았다. 질기디 질긴 닭발을 씹다 씹다 포기하고 나는 막걸리를 마시면서 그냥 목으로 꿀꺽 삼켰다. 선배라는 사람 앞에서 씹던 닭발을 내뱉지도 못했다. 닭발의 기억은 나를 아프게 했다.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 닭발을 먹지 않는다.
목포의 첫 추억은 그렇게 남았다. 그 목포를 2018년에 대학친구들과 진도로 여행하면서 두 번째로 들렀다. 옛날 목포가 아니었다. 유달산도 그 유달산이 아니었다. 성장개발 폭주 사회에서 “산천은 의구한데”라는 오래된 구절도 옛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
2.
하여간 그렇게 오래전에 보았던 도담삼봉을 이번 여행에서 다시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빠르게 지나가는 차 안에서.
마음 같아서는 수십 년 전 그때처럼 도담삼봉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혁국과 재관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궂은 날씨로 인해 드디어 잔뜩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동차 차창에 굵은 빗방울들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행 중인데 약간 처량한 날씨였다. 자동차는 빗길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는데, 혁국이 갑자기 외쳤다.
“저기 도담삼봉 있으니까 빨리 봐.”
나는 꿈에서 깬 듯 잽싸게 휴대폰을 켜고 창문을 내렸다.
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
그렇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나는 도담삼봉 모습을 아주 잘 찍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니다. 예사롭지 않은 놀라운 집중력의 결과라고 나는 굳이 강조하고 싶다. 그 결과를 아래 사진으로 소개한다.
3.
그런데 도담삼봉이 뭐길래?
우리 선조들은 ‘팔경’이란 말을 좋아한다. 어디를 가도 ‘팔경’이란 말을 볼 수 있다. 대한팔경, 관동팔경, 단양팔경… 이런 식이다.
하여간 단양팔경 가운데 1경이 바로 도담삼봉이다. 우리는 비록 시간이 모자라서 모두 보지 못하고 떠나지만, 열심히 여행을 다닐 사람들을 위해서 나머지 칠경을 알려주고 싶다.
2경은 도담삼봉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석문. 가운데 구멍이 난 돌이 문처럼 생겨서 석문이라고 한다.
3경은 병풍바위가 아름다운 사인암. 수많은 책을 쌓아놓은 듯 보이는 절리가 일품이다.
4경은 구담봉.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볼 수 있는 바위 봉우리다. 단양팔경인데 행정구역 상으로는 제천시에 있다.
5경은 옥순봉. 구담봉에서 뱃길로 5분 정도 내려오면 보이는, 대나무를 닮은 바위 봉우리.
6경~8경은 단양군 단성면 선암계곡에 있는 기암괴석들이다. 상중하 세 곳이 있는데, 상류 암석을 상선암, 상선암에서 조금 내려오면 볼 수 있는 암석이 중선암, 더 내려와서 보는 암석이 하선암이다. 여름에 물놀이하기에 아주 좋아 보이는 넓은 바위들이다.
그래서 다시 도담삼봉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그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설화에 의하면 도담삼봉은 정선군에 있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온 거라 정선에서 단양에 매년 세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때 어린 소년이었던 정도전이 도담삼봉을 우리가 갖고 싶어서 갖고 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이 막혀 피해를 보니 정선군에서 도로 가지고 가라고 말하여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정도전은 도담삼봉을 특히 사랑하여 자신의 호 '삼봉'도 여기에서 따왔다고 한다.”(나무위키)
도담삼봉은 물 위로 세 개의 봉우리가 떠 있어서 유명한데,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하고, 북쪽 봉우리를 처봉, 남쪽 봉우리를 첩봉이라고 한다. 삼봉 정도전이 아내와 첩을 두었는데, 아들을 얻고자 첩 쪽으로 돌아서 앉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후세에 그런 불륜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이좋은 가족처럼 아버지봉, 아들봉, 딸봉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렇다 해도 그러면 엄마봉은 어디에 있을까.
하여간 장군봉에 ‘삼도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1766년에 단양군수 조정세가 ‘능영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던 것이 처음이었고, 이후에 여러 차례 유실되었다가 1972년에 김상수가 새로 지어서 단양군에 기증했다고 한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호를 도담삼봉에서 따왔다는 설에 관하여 영주시와 단양군의 주장이 엇갈린다고 한다.
“영주시에서는 정도전의 호는 도담삼봉이 아니라 삼각산(북한산)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정도전이 삼각산의 세 봉우리 아래 집을 짓고 살던 때 그의 동료들이 삼봉이라 부른 것을 마음에 들어 하여 호를 정한 것이라고 한다” (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d32rALuwR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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