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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친구 Y에 관한 뒷이야기

2024년 가을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이 여행기 서두에서 내 친구 Y의 죽음과 나의 한국 방문 사정에 관해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 이야기를 마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러한 여행기의 성격상 이렇게 우울하고 슬픈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서울로 날아오게 된 데에는 그와의 관계에 관한 배경이 얽혀 있어서 여행기 서두에 불가피하게 밝혀둔 것이다. (지금까지 내 글을 자주 읽은 독자는 나의 다른 글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친구 Y에 관한 언급이 있었음을 알 것이다.)


2024년 2월 죽은 내 친구 Y는 평생 담배를 끊지 못했다. 간암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기 검사에서 암세포가 발견될 때마다 치료하면서 그는 담배를 계속 피웠다. 간암에 흡연의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는 굳이 담배를 끊으면서 생명을 연장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또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그는 젊을 때처럼 담배를 많이 피우지는 않았다. 젊었을 때 그는 소위 ‘골초’였으니까. 아마도 이십 대 초에 진실한 천주교인이 되었던 그가 그토록 담배에 연연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간암이 진단되고 치료가 진행되면서 그는 점점 삶과 죽음에 달관하는 듯 보였다. 언젠가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내가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그러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왜 담배를 끊지 않는가 꼬치꼬치 따진 적은 없다.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흡연 습관은 마치 본능과 같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는 굳이 담배를 끊으면서 오래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그것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나 성경이 꼭 명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던, 또는 가톨릭에서 그렇게 이해되었던, 흡연을 인생 말미에 이르러 굳이 끊을 필요까지 느끼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 선택을 두고 내가 뭐라 할 말은 없다.

그의 흡연에 관하여 그가 꼭 의지가 약해서 끊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담배를 끊는 것이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에 합치되는 것이라면, 그가 진실로 그렇게 믿었다면, 그는 언제라도 담배를 끊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삶 전체를 통해 늘 성실하고 진실된 삶을 추구하는 편이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성격이었고 인생관이었고 삶의 철학이었다.


그가 간암에 걸린 것을 확인했을 때 한국을 방문했던 나는 그에게 담배를 끊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그는 그럴 의지가 없었다. 그는 비흡연자인 나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담배를 피웠고, 언제나 주머니에 휴대용 담배꽁초 갑을 가지고 다니면서 담배를 피우고 난 후 꽁초를 그 안에 넣는 예의를 갖추었다. 자신도 담배를 피우지만,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리는 사람들이 그는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만큼 그는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고 절대로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는 또한 걸어 다니면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담배 연기가 뒤에 오는 사람에게 불편을 줄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남에게 베풀면 베풀었지, 남으로부터 베풂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이라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진실한 의미가 담긴 성의와 선물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진심이 담겨 있고 그것을 진정으로 전달하려는 의지가 확인되면 그는 기꺼이 타인의 선물도 받아들였다. 그것이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상대방에게 성실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심코 상대방을 위해서 받을 줄 알고,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자 했던 사람이 그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에게 성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을 결코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된 정을 나누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아니라고 느낀 사람에게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가 그를 직접 옆에서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람 관계에서 맺고 끊음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그것은 나처럼 명확하게 맺고 끊음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꼭 배울 만한 덕목이다. 배우고자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2.


어릴 때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똑똑했던 친구 Y를 기억한다. 영등포구 문래동 언덕길을 올라 꽤 허름한 집에서 살았던 그는 말 그대로 가난한 집 아이지만 똑똑한 학생이었다. 내가 교회 친구를 통해 그를 처음 알게 되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나는 단박에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그와는 다른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더욱 알고 싶어서 또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연락하고 그를 만나고자 했고 그를 따라서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는 '좋은 친구'를 찾고 만나고 유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기다. 좋은 벗을 두는 것은 영원히 나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벗을 찾고 유지하는 데에는 때로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학교의 연대장이었다. 지금은 그런 제도가 없겠지만 그때는 고등학교에서 교련이라는 과목으로 군사훈련을 받았고, 학교를 군대 방식으로 분류하여 '연대'로 취급했다. 당시에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는 보통 3천 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런 규모를 군대 식으로 생각해서 '연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학교의 연대장이 아니었어도 그랬을 테지만, 그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남다른 지도력을 발휘하는 리더 스타일이었다. 아마 처음에 그런 점들이 내가 그를 굳이 애써 친구로 삼으려고 했던 이유이면서, 아울러 그에게 거리감 또는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가진 강한 자아의식과 독립심, 자존심, 리더십 등과 내 성격이 충돌하는 지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친한 친구라 해도 갈등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중요한 것은 그런 갈등을 잘 마무리 짓고 다시 우정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는 여행을 해도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다니는 스타일이다. 나도 계획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런 사람과 여행하면 편하기는 하다. 그냥 따라다니기만 해도 되니까. 소기업도 경영해 보고 대기업에 취직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오십 대 중반에 대기업의 최고위급 임원으로서 은퇴했다.


여행을 좋아해서 그는 끝없이 여행을 다녔다. 국내외를 막론해서 하도 여행을 자주 다니길래 언젠가 내가 농담조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너 이 자식, 맨날 그렇게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객사한다.”


그런 말을 할 때는 서로 웃으면서 던지는 농담 성격이 짙지만, 내심으로는 그냥 헛소리로만 한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를 걱정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언제나 위험성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수많은 여행 가운데서도 다행히 그는 객사하거나 돌연사하지 않았다.


간암 발생과 암세포의 끝없는 생성과 발전은 결국 그로 하여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죽음을 준비하도록 이끌었다. 아마 5년 정도 걸린 듯하다. 간암 발병 확인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의 언제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암의 말기는 갑자기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서 마치 미처 손 쓸 여유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을 준비와 각오를 모두 해놓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언제쯤 죽을지 대충이라도 알게 되는 것이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처럼, 어차피 죽을 바에야 어느 날 갑자기 죽으면 좋겠다는 것은, 정말로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다면, 나아가 스스로 죽음을 담담하게 또는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조금 천천히 죽어도 되지 않을까.




3.


그는 50대 중반에 회사로부터 거액의 은퇴금을 받고 나왔다. 그리고 제주도로 가서 살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서귀포에 땅을 사고 그곳에서 살 꿈을 꾸었다.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거기서 숙박업소를 차리고 제주도로 여행 오는 사람들을 받아서 여행을 안내하고 인생에 관해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간암이 찾아왔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서 결국 제주도가 아니라 큰 병원이 가까이 있는 서울에 있어야 함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제주도에서 살겠다는 꿈을 접었다. 그래도 그는 하남에 자리를 잡은 후에 마냥 집에서 있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택시 운전기사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낯선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도 약간 그렇긴 하지만, 그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또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는 어쩌면 신이 종종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택시 운전기사가 될 준비를 모두 끝냈다. 택시를 사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 다가왔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으며, 결국 그는 택시 운전기사가 되기를 포기했다.


그는 이번에는 평신도를 위한 가톨릭 대학원에 입학했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지혜를 향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한편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더욱 확대시킬 것으로 믿었다. 그것은 대학원 3년 과정인 듯했다.


1, 2년인가 흐른 후에 한 번은 그가 자신의 성적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렇게 멋진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 모든 과목 성적이 A+였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에 앞서 대학원 공부에 그렇게 열심이었던 것이다.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그에게 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너, 이 자식 대학 다닐 때는 맨날 술 퍼먹고 놀기만 하더니 이제 사람 됐구나. 이번에 대학원 졸업하면 아예 독일로 유학 가는 게 어떠냐? 그 덕에 나도 독일 여행할 수 있을 테고."


그는 독문과 학부와 대학원 출신이라서 조금 노력하면 독일로 유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가 간암을 극복하고 유학까지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지, 자신의 몸이 낫기만 한다면, 정말로 완치가 된다면,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 그가 정말로 독일로 유학까지 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기꺼이 그가 있는 독일의 어느 도시로 여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이번에 한국으로 올 때 나는 그의 무덤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가서 그가 정말로 이 지상에서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정말로 없어져서 내가 다시는 만날 수도, 대화할 수도, 함께 여행할 수도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여행하고 함께 걷자는 우리의 약속을 어긴 그를 나무라고 싶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슬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목놓아 소리를 내어 울고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친구 Y의 무덤은 없었다. 그 사실을 서울에 와서야 다른 친구로부터 들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의학대학에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나의 교회 친구는 그의 몸이 대학에서 2~3년간 연구용으로 사용된 후에 화장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무덤 앞에 가서 작별인사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민했다.

어디로 가서 그와 작별인사를 한단 말인가.



10월 중순 어느 날, 나는 그의 부인에게 전화했다.


그날 저녁 나는 그가 살았던 하남으로 갔다. 작년 한국 여행에서 출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흘간 그와 함께 있었고, 출국하는 날 한강 둔덕을 함께 걸었던 곳이다. 공항버스 정거장에서 그와 마지막 악수를 하고 헤어졌던 곳이다. 거기에 그의 마지막 말소리, 숨소리, 몸짓, 우수 어린 얼굴 표정이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때 묵었던 호텔 앞으로 갔다. 그 앞에는 미사호수공원이 있다. 그의 부인을 만나기에 앞서 나는 한 시간 넘게 그 호숫가를 배회했다. 그가 있다면 나는 이번 여행에서도 그곳에서 또다시 며칠을 머물렀을 것이다. 호수공원으로 들어간 것은 처음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았다. 1년 전쯤, 아침 8시에 뜨거운 커피를 양손에 들고 그가 오면 그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호텔 창문가에서 내려다보던 공원이었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에 휩싸여서 그곳을 혼자 걸어 다녔다.


그가 없는 상황에서 그의 부인은 다행히 씩씩한 모습이었다. 역시 성실한 천주교인인 그녀는 성당 여성 모임을 주도하고 성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그런 인재였다. 겨우 한 시간 남짓 그녀와 약간 어색한 모습으로 대화하면서 식사를 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하남을 떠나면서 나는 속으로 친구 Y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중에 또 언제 그를 만나겠다고 하남으로 갈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그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야, 너를 만나서 무척 좋았다.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

어디에 있든 부디 잘 지내. (끝)



https://www.youtube.com/watch?v=OomaNxkY-KY

EMMYLOU HARRIS - GOODBYE


<알림>

그간 부족함이 많은 여행기를 애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걷거나 타거나 3>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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