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여행 이야기
1.
서울을 떠나기 전날, 송별회를 겸하여 혁국과 재관과 상국을 다시 만났다.
이번 여행 기간에 그들을 만나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들을 만나기에 앞서 오전에 나는 덕수궁으로 갔다. 그 옆에 있는 정동제일교회와 서울시립미술관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동제일교회는 덕수궁 옆에 있어서 한국에 올 때마다 와보는 듯한데 역사관까지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다. 이 기념관은 2023년 11월 개관했기 때문이다.
정동제일교회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그 안에 역사기념관이 있다. ( http://history.chungdong.org/html/main.asp 정동제일교회 역사기념관 사이트. 이 사이트에는 조선근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1885년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다. 이 교회의 벧엘예배당은 1897년에 한국 개신교 최초로 서양식 예배당 건물로 지어졌다. 정동제일교회는 오늘날까지 한국 감리교단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교회이며, 여러 분야에서 ‘한국 최초’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이 교회의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고,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 또한 이 교회 교인이었다. 이 일로 인해 정동교회는 일제에 의해 일시적으로 극심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 또한 이 교회의 장로였다.
3.1 독립만세 시위에는 이 교회에 다니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뿐 아니라 청장년 교인들도 많이 참여했다. 그들 중 많은 숫자가 체포되었고,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교회의 저녁예배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 당시 정동제일교회에서 비밀리에 <독립신문>이 제작되기도 했다.
유관순 열사(1902-1920)는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부터 정동제일교회에 참석했다. 3.1 운동이 발생했을 때 그녀는 이화학당 학생들과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고향 천안 아우내에서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됐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0년 9월 겨우 18세 나이에 고문으로 순국했다. 그해 10월 14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 교회에는 유관순 외에도 많은 애국지사들과 신여성들이 있었다.
정동제일교회는 진정으로 한국교회사에서 중대한 한 획을 그었다.
정동제일교회로 오가는 길은 덕수궁 돌담길이다. 비가 내려서 거리로 떨어진 낙엽들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정동교회를 둘러보고 나왔을 때 마침 우수 어린 거리로 예쁜 교복을 입은 예원학교 학생들이 줄지어 나왔다.
청순한 그들을 보자 아득한 옛 생각이 났다. 내가 그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 가을이 깊어져 지금처럼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친구들에게 툭하면 했던 말이 있다.
“첫눈 내리는 날, 덕수궁 정문에서 만나.”
나는 첫눈 내리는 날 여자친구와 덕수궁 돌담길을 눈 맞으면서 걷고 싶었다. 아주 낭만적일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고대했건만 정작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과 첫눈 오는 날 그 돌담길을 함께 걸어본 적은 없다.
정동교회를 나올 때 다수의 교인들이 마당에서 웃으면서 떠들고 있었다. 교회로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이 일상일 테니 그들은 낯선 사람을 봐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교회를 나와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작년에는 그 앞까지 왔다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돌아가야 했던 곳이다. 오늘은 조금 더 차분하게 미술관을 돌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2.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나왔을 때 또 비가 내렸지만 혁국과 재관과 상국을 만나러 가는 길에 다행히 비가 그쳤다. 부천에서 만난 우리는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날은 2차까지 갔다.
마음 같아서는 더 늦게까지 놀고 싶었지만 그것은 출국을 앞둔 나의 심정이 그랬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제 가면 또 언제 오나. 말로는 내년에 또 올 수 있을 것 같이 떠벌렸지만 그런 희망이 항상 바라는 대로 잘 이뤄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날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벅차올랐다. 아울러 여러 시상이 떠올랐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시를 네 수나 지어서 전화기에 옮겨 적었다. 그런 날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그날밤 출국을 앞두고 나의 감상이 깊었던 탓이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다시 오지 않을 우리 이 순간
가면서 돌아보지 마
그 자리에서 돌로 변한단다
늦은 밤 추적추적 가랑비는 내리는데
헤어진 후 가던 발길 멈추고
차마 돌아보지 못함은
마음까지 돌로 변할까 두려워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나 간다고 서러워 마라
때가 되면 다시 오리라
3.
다음날 아침, 맑은 하늘에 눈부신 태양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느덧 대기에서 약간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잠실새내역에 있는 새마을시장으로 가서 브런치를 먹었고, 돌아와서 고시텔 방을 청소하고 차분히 가방을 쌌다. 옷만 접어서 담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방을 모두 청소하고 나서 사진을 찍고 그것들을 고시텔 주인에게 보냈다. 방에서 나간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방에 남은 모든 흔적을 지우고 싶었지만 샴푸와 물비누, 물 몇 병과 우산 하나가 남았다. 작년에는 음료수와 책들과 영양제가 남아서 그것들을 고시텔 주인에게 주었었는데, 올해는 남은 게 별로 없다. 고시텔 사장은 모두 양호해 보인다면서, 애초에 보증금을 냈던 내 교회 친구에게 전송하겠다고 말했다.
작년에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됐던 것을 기억해서 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일찍 공항으로 갔다. 작년에는 출국일에 하남에서 친구 Y와 한강 둑길을 두 시간 넘게 걸은 후에 함께 점심을 먹고 공항버스를 탔었다.
이번에는 나 혼자 강남역으로 갔다. 지하철과 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인천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그나마 대중교통수단이 잘 되어 있어서 다행이지만, 역시 인천공항은 서울 시내에서 가기에는 좀 멀다.
기껏 일찍 갔더니 이번에는 작년에 비해 출국 과정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끝났다. 탑승하기까지 거의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앉아 있기가 지루해서 나는 공항 내 식당으로 갔다. 기내에서 두 번이나 식사를 제공하므로 미리 저녁 식사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기다리고 있기도 너무 지루했기 때문에.
인생은 때로는 너무나 시간이 모자라고
때로는 너무나 시간이 남는다.
도대체 세상사가 너무 조화로워서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질 때는 별로 없다.
늘 뭔가 남든지 모자라기 일쑤다.
그런 현실을 우리는 애타게 마음을 조이면서
또는 하품이 나도록 지루하게 버티면서 산다.
이제는 으레 그렇다는 것을 아는 듯하지만
막상 그럴 때가 다시 찾아오면
잘 적응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시간은 또 너무나 모자라거나 너무나 남는다.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질 때는 별로 없다.
이렇게 해서 2024년 가을 한 달간 서울 여행이 끝났다.
이번 방문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들이 없다 해도 나는 한국을 그리워하겠지만, 그들이 있어서 한국이 더욱 그립다.
다시 볼 때까지 모두 평안하길 빌어요.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길 기도할게요.
먼 곳에 있다고 나를 잊지 말아요.
안녕, 친구들이여.
안녕, 한국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SvJYbg4zsR0
ABBA - I Have A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