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계곡과 LP바 3

2025년 한국여행 이야기 18

by memory 최호인

8.


점심을 먹기 위해 우리는 삼청로에서 북촌로5길로 천천히 걸어갔다. 걷던 중간에 조금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 보여서 들어갔는데, 향숙이 입구에 있는 메뉴와 가격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런 곳은 쓸데없이 비싸기만 해. 맛은 비슷하니까 다른 데로 가자.”

우리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믿으면서 군말 없이 그녀를 따라나갔다. 맛이 조금 차이가 있다 해도 그런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돈가스와 메밀국수 전문 식당이었다. 무더운 날이어서 키오스크에 나타나는 냉모밀이 맛있어 보였다. 향숙이 돈가스와 냉모밀 중 하나만 선택하기 어려우니까 콤보 음식을 먹으라고 향숙이 나에게 말했다. 모두 키오스크에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결제는 향숙이 했다. 향숙이 “오늘은 내가 살게.”라고 호탕하게 말했다. 언제 먹어도 냉모밀은 맛이 없을 때가 없다.


점심을 먹으면서 미란과 향숙이 잠시 논의하더니 식사 후에 수성동계곡으로 가자고 했다. 더우니까 계곡 물가가 좋을 것 같다고. 그때 나는 수성동계곡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서울 시내에 물 흐르는 계곡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환영이었다.


맑고 환한 표정을 지은 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라고 향숙과 미란이 말했으므로 상국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무더위와 뙤약볕 아래에서도 여학생들이 괜찮다는데야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긴 챙이 큰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상국은 워낙에 잘 걷는 사람이었다. 나도 가방에서 비장의 무기인 듯 선글라스를 꺼내어 끼었고, 우리는 드디어 눈부신 거리로 나섰다.


수성동계곡은 인왕산 밑자락에 있었다. 밝은 햇빛을 받으며 우리는 천천히 경복궁 뒤를 돌아서 서촌 북쪽에 있는 통인시장으로 갔다. 우리가 식사하던 곳부터 수성동계곡까지 거리는 거의 3킬로미터 정도 되었다.


20250910_140417.jpg
20250910_140428.jpg


9.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았던 우리는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면서 경복궁 돌담길을 걸었다. 말 그대로 이런 순간을 기념해야 한다면서 나란히 서서 사진도 찍었다. 효자동 청와대사랑채 앞을 통과하고, 서촌으로 나가서 통인시장도 통과했다. 한낮의 통인시장은 무더위에 지친 한산한 모습이었다.


수성동계곡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인 ‘옥인길’은 부분적으로 80년대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 길로 오르다 보면 중간에 ‘윤동주 하숙집 터’라는 금속판이 대문 옆에 붙은 삼층집이 있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현재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집 대문 앞에서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과 3층에 큰 창문이 보였다. 윤동주는 2층에 살았을까 아니면 3층에 살았을까.


윤동주가 살던 시절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층 창문 옆에 붉은 벽돌담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과거에 이 집은 단층집 또는 이층집이었다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동주는 혹시 2층에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보니, 2층 창문에서 어린 학생 빡빡머리 동주가 거리를 내다보는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20250910_141635.jpg


일제강점기에는 윤동주 하숙집이 있는 옥인길에 지금처럼 인가가 많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꽉 들어찬 집들로 인해 그때의 풍경을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계곡 입구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교회와 아파트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인왕산 풍경과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이 지역에는 그나마 다른 지역처럼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없고 수십 년 전 동네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정감이 갔다. 옥인길 옆으로 뻗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좁고 꼬불꼬불한 길들이 있고 다닥다닥 붙은 단층집과 이층집과 삼층집들, 세련되어 보이지 않지만 다정한 느낌이 드는 오래된 작은 가게들, 걸어 다니는 사람들 등 아파트 단지에서 볼 수 없는 그리움과 정겨움이 아직 그 동네에 머물러 있다.

70년대에 수성동계곡에 개발 붐이 일어서 아파트들이 들어섰는데, 나중에 서울시는 난개발을 제한하면서 겸재의 그림을 바탕으로 옛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수성동이 서울특별시의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왔던 수성동계곡을 한 달 정도 후에 나는 걷기 동호회를 통해 다시 방문했었다. 그때는 덕수궁부터 광화문을 거쳐 서촌 일대를 모두 걸어서 여행했다. 그때는 친구들과 올 때보다 조금 더 계곡 안쪽까지 올라갔다. 계곡에서 내려올 때는 옥인길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러서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니라 동네의 사랑방 느낌을 주는 작은 카페에 앉아서 마시는 커피가 더 맛있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할까. 각종 케이크도 직접 굽는 그 카페의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뭐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수성동(水聲洞)'이란 이름은 계곡에서 맑고 경쾌한 물소리가 들려서 붙여졌다. 여기서 ‘동’은 행정적 의미가 아니라 ‘계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계곡에는 청계천 지류인 옥류동천이 흐르며 총길이는 190미터 정도다.


이 계곡은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고 한다. 경관도 빼어나고 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하기에도 좋다. 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겸재 정선이 ‘수성동’이라는 제목으로 화폭에 담아서 더욱 유명하다. 겸재의 그림에 나오는 돌다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다리는 겨우 기다란 돌 두 개로 만들어졌고 기린교라고 불린다. 상상 속 동물인 기린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그 다리로 건너 다녔겠지만 지금은 안전 문제로 접근 금지다.


우리는 겸재가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섰다. 거기에 겸재 그림 복사본이 설치되어 있다. 그 장소가 특별히 사진 찍기에 좋고, 계곡을 바라보면서 경치를 감상하기에도 좋다.


겸재가 그곳에 와서 선비들과 어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 시절에 이 계곡은 지금보다 숲과 물이 더 풍성했을 것이다. 그들이 거기서 어떻게 풍류를 즐겼는지 모르지만 , 오늘날 수성동 계곡에는 그렇게 즐길 만큼 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다. 그 물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갔을 때는 계곡 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초라할 정도로 물이 적게 흐르고 있었다.


“요즘 가뭄이라서 그런가 보다.”

쫄쫄 흐르는 물을 보면서,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이 계곡에 왔었다는 미란이 말했다. 이 계곡이 여러 번 와볼 만큼 멋있는 곳인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한 달 정도 후에 다시 수성동계곡에 가보았을 때도 계곡 물은 풍성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계곡에 물 씨가 말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향숙과 미란은 꾸역꾸역 물을 찾아 계곡 안으로 올라갔다. 대도시에 살면서 계곡 물이 그리운 새처럼, 아니면 옛날 여인네들의 습관처럼 그들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쉴 곳을 찾았다. 그들은 기어코 어느 큰 바위 아래 물가에 앉더니 곧 신발을 벗고 맨발을 물에 담갔다. 향숙은 샌들을 신고 왔기 때문에 발을 물에 담그기 편했다. 미란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에 발을 담갔다.


물가에 앉기 좋은 평평한 돌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상국과 나는 하릴없이 물가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자 향숙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앉을자리를 마련하려는 듯이 물에 반은 잠긴 돌들을 마구 뒤집어 젖히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깡촌에서 자랐다고 하더니 향숙이 저리도 억척스러웠나. 자연과 친화력이 없어 보이는 도시 남자 앉으라고 저리도 물에서 돌들을 헤집어 놓다니.


원래는 남자들이 들어가서 여학생들이 앉을자리를 만들어 줬어야 했는데 거꾸로 됐다고 나는 속으로 약간 미안하게 생각했다. 원래는 굳이 앉을 생각이 없었지만 향숙의 성의를 봐서라도 돌에 앉아야 할 듯했다. 물이 너무 적어서, 차마 양말과 신발을 모두 벗고 발을 담그기가 민망할 정도였지만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앉은 모습을 보니까 계곡에서 금세 떠날 기색이 아닌 듯했다. 딱딱해서 다소 불편했지만 나도 드디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양말과 신발을 벗고 두 발을 물에 담갔다. 시원하기는 했다.


얕은 물에 잠긴 향숙의 하얀 발들을 바로 눈앞에 보고 있으려니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발톱이 밝은 하늘색으로 칠해진 모습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향숙도 발톱 미용과 관리에 저렇게 신경을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미란의 발톱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0250910_141732-2.jpg
20250910_141830.jpg
20250910_142055.jpg
20250910_142128.jpg
20250910_151003.jpg
20250910_151012.jpg


10.


초라한 계곡물에서 잠시 발을 식힌 후에 우리는 다시 옥인길로 걸어 나왔다.

통인시장으로 돌아와서 한산한 시장 풍경을 보면서 지나갔다. 원래 전통시장에 들어오면 뭔가 먹거리를 찾아 군것질이라도 하고 싶기 마련인데 떡볶이마저 너무 기름져 보여서 우리는 차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조금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통인시장을 지나 자하문로로 나왔다. 상국이 드디어 자기 역할을 찾았다는 듯이 부지런히 휴대폰 지도를 보면서 우리가 가기로 했던 LP바를 찾았다.


음악이 CD로 담기기 전에 카세트테이프와 LP레코드판이 유행했던 시절이 있다. LP는 Long Play의 약자이다. LP판이 나오기 전에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소리를 담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LP레코드판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CD부터 시작되는 디지털 음악이 아니라 아날로그 소리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 턴테이블에 검은색 둥그런 레코드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듣고 싶은 노래 앞에 뾰족한 핀을 올리면 곧 빙빙 도는 레코드판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던 그 시대. 집에 거대한 스피커를 가진 전축을 가지고 있으면 부잣집이고 교양이 있는 가정이라고 으스대던 시대. 우리는 아직 그 어린 시절의 낭만을 잊지 못한다.


상국은 다행히 금세 LP바를 찾았다. 큰길가 1층에 눈에 띄는 파란 출입문이 있는데 거기에 ‘서촌블루스’라고 적혀 있다. 문을 열면 가파른 은색 철제 계단이 있고 2층에 서촌블루스가 있다. 계단을 가팔라 보였지만 나무가 아닌 철제 계단이어서 상당히 튼튼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겨우 오후 네 시였다.


20250910_153330.jpg
20250910_154121.jpg


LP바에 손님들이 오기에는 너무 일렀던 듯하다. 위치도 좋고 실내 분위기도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서 저녁에는 사람들이 몰릴 듯 보였다. 입구로 들어서면 기역자 모양의 스탠드바가 있었고 길가 쪽으로는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스태프가 일하는 스탠드바 안쪽에도 기역자 모양의 책장형 진열대가 있었고 큰 책꽂이 같은 선반에는 LP레코드판과 CD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실내에는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젊은 여성 종업원은 마치 잠에서 깬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자하문로가 내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종업원은 메뉴판을 갖다 주었지만, 우리가 뭘 먹는지 마시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미란은 기분이 좋은지 특제 맥주를 주문하겠다고 했고 상국도 맥주를 마시겠다고 했다. 향숙과 나는 차를 주문했다.


상국은 이런 곳에서는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하는 것이라고 해서 우리는 각자 신청곡을 적었다. 젊은 여성 종업원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 표정도 없이 우리가 적은 쪽지를 가지고 갔고 조금 후에 우리가 신청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낯선 공간에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나는 두 개의 벽에 진열된 LP레코드판을 대충 헤아려 보았다. 겨우 수백 장 정도로 보이는 LP판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신청한 노래들이 담긴 LP판이 모두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여기에 향숙이 신청한 80년대 한국 노래가 담긴 LP판마저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향숙이 신청한 노래는 LP판이 아니라 다른 음원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고 의심했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안으로 가서 조사할 수는 없었다. 다만, 우리가 신청한 음악이 나오는 동안 여성 종업원이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나는 우리가 정말로 LP판 음악을 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정말 궁금했지만, 손님에게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얼굴에 웃음도 전혀 없는 여인에게 묻고 싶지도 않았다.


특제맥주를 마시면서 미란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과일 안주와 맥주를 더 시켰다. 상국과 둘이서 맥주를 잘 들이켰고, 우리는 흥겹게 떠들었지만 지금은 무슨 내용인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것도 좋다. 한참 웃고 떠들었는데, 나중에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것.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함께 마주 앉아서 즐겁게 시간을 죽이는 것에서 우리의 우정을 되새기고 추억을 쌓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한국으로 여행을 왔다고 하여 이렇게 만나서 미술관과 계곡에도 가고 식사도 하고 음악도 들으면서 시간을 나누는 것은 우리 우정의 생산적 소비였다. 맥주를 마시고 기분이 더욱 좋아진 미란은 LP바에서 먹고 마신 값을 흔쾌히 냈다. 오늘은 호탕한 두 여학우를 만나서 즐거웠던 날이다.


20250910_154235.jpg
20250910_154156-2.jpg


11.


오후 여섯 시 정도 되어서 아직 밝은 거리로 나왔다. 우리는 이미 온종일 함께 어울리면서 조금 지쳤으므로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미 여덟 시간이나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거의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것이다. 나이 들어서 그런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대한 에너지가 소비되기 때문이다.


절제의 화신인 향숙이 먼저 그만 가자고 했다. 미란도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LP바에서 나온 우리는 함께 경복궁역으로 걸어갔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향숙은 내가 두 달 동안 서울에 있을 것이라고 하니 다음 달에 또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한 주에 한 번씩 만나서 다른 박물관들도 함께 다니면 좋겠지만, 나름대로 꽉 짜인 일상을 지키려는 친구들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또한 사는 곳도 사방팔방 찢어져 있었다. 집이 멀어서 시내까지 나오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므로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즐거운 오늘을 마음에 담고 돌아섰다. 사실 그날 저녁에 나는 치과에 가야 했다. 내가 맥주를 마시지 않은 것은 술에 약해서 한 모금만 마셔도 금세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는 것도 있었지만 치과에 갈 예약이 있어서 그렇기도 했다.


시월 하순에 출국하기에 앞서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향숙과 미란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상국은 지방여행까지 합해서 더 자주 보았다. 서울로 여행 오면 이렇게 옛 친구들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치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