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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Apr 15. 2023

그날 - 이성복

사노라면의 붓 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를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痛)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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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그날'입니다.


70년대 어느 즈음의 '그날'이겠지만 어쩌면 누구에게는 요즘의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시의 마지막 문장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처럼 말이지요.


아프지 않기에 스스로의 병을 깨닫지 못하는 아이러니의 시간입니다.

깨닫지 못하기에 부끄러움도 없고, 자아성찰이 없기에 뻔뻔합니다.


아프지 않은 병이 점점 깊어지는듯한 사월의 비 오는 토요일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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