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than Aug 26. 2015

예비군 훈련장에 펼쳐진
페르마의 밀실

그대, 숭고한 사명의 자판기여라.




지금처럼 비가 많이 내리기 전, 예비군 입영훈련 때의 일이다.


2일차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지금의 지루함을 견디려면 내게 청량한 자극이 필요하다! 모두가 일찌감치 알고 칭송해왔듯, 평소 내 젠틀하고 지적이고 고상한 취향에 어울리는, 그런 자극이 필요해!' 라고 외치며(실제로 외쳤다) 눈에 불을 켜고 국방부와 그곳의 간부가 준비한 또는 그냥 그렇게 있었을 뿐인 모든 것들을 내 맘대로 상큼하게 비틀어 곡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곳의 자네들이 무슨 의도였건 나는 내 뇌내망상으로 즐겁고 싶었거든. 


하지만 그런것은 우리에게 있을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비군 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린 거스를수 없는 운명의 아저씨, 예비군일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카페인과 당분을 공급하던 자판기에서 음료가 나오지 않게 되고 말았다. 분명 돈도 들어갔고, 투입 금액도 표시되니 자판기가 돈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품목별 버튼에 품절표시는 일부 뿐이었고, 품절 점등이 들어오지 않은 버튼에도 판매 가능을 나타내는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누르면 무언가를 애타게 알리는 듯한 피치의 삑삑 소리만 날 뿐 제품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정말로, 낙담했다.

약물 의존도에서 마리화나와 같은 레벨로 분류되는 카페인을 더 이상 섭취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마치 일본이 마침내 침몰하여 우리의 성장기를 풍요롭게 해주었던 각종 유익한 시청각 자료는 모두 소실되었다는 소식과 비슷한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때 우리에게 원두가루가 주어졌다면 아마 곱게 갈아서 돌돌만 종이를 대롱 삼아 코로 들이마셨을 것이다. 훈련소 때 불교 행사를 가서 자판기의 원두와 프림과 설탕을 약탈해 와작와작 씹어 먹었던 기억이 나는군. 아아... 흡사 마약과도 같았던, 기독교 종교행사에서 받은 성경을 찢어 만든 배덕적인 종이 필터 드립 커피...정말 드럽게 맛없었지... 가 아니고. 하여튼,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아이린 애들러를 스캔하는 셜록의 눈초리로 자판기를 관찰했다. 

돈이 모자라거나, 상품이 모두 품절되었을 시의 자판기 상태와는 무언가 달랐다. 


어째서지? 예비군의 마법의 의해 신생아 때와 같은 수준으로 청순해졌던 머리에 약간의 부하가 걸렸다. 자극이 가해졌다. 뉴런에 불꽃이 튀었다. 뇌세포가 서로 다시 연결되어 명쾌한 한 붓 그리기와 같은 정답의 경우를 탐색하고 있었다. 이것은 쾌락과 같았다. 그렇다! 국방부가 우리를 위해 준비한 지적 탐미였다! 나는 알아챘다. (뭘...) 이것은 퀴즈다. 이곳에 몰아넣은 귀여운 예비군 햄스터들을 위해 준비한 쳇바퀴였다. 우리는 흥분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을거야! 더 지니어스 예비군! 우리는 다시 살아났다. 머리를 모으며 토론했다. 햄스터들이 모여들었다. 저마다의 소속 마크를 달고 삼삼오오 모여 가설을 제시하고 탐구했다. 답을 찾을 인간들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스러져가는 자판기의 불빛에 얌전히 수긍할 리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 순간 내가 발견하고 외쳤다.


"이곳을 보시오! 이곳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불빛이 있소. 이것은 알리고 있소. 자신의 마지막 수명을 다하여 작게 깜박거리고 있었소... 이것은 동전없음이라고 말을 전하고 있소... 그렇소...동전이 없는 것이었소..." 

나는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동전이 없었기에, 이 자판기는 거스름돈을 돌려줄 수 없어 판매를 거부했던 것이오. 이 숭고함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주어진 임무와 우리들의 갈증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이오. 그리고 결론을 내렸겠지... 우리는 자판기를 미워해선 아니되오. 50원 단위로 가격이 책정된 탓이 컸을 것이오. 100원 짜리 동전은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다니기에, 100원 단위의 가격이었다면 사람들이 투입한 동전으로 거스름돈을 돌려줄 수 있었겠지. "


같은 중대였던 서울대 출신의 전우가 되물음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50원 짜리 거스름돈이 필요없는 총 금액을 투입해도 되지 않는 것이지? 버튼을 누르는 순서도 불빛과 경고음으로 통제하고 말야."


나는 대답했다.


"아무래도 예기치 못한 경우의 수, 즉 50원짜리 및 100원짜리 거스름돈을 주어야 하는 상품의 조합으로 귀결될까봐 그런것이 아닐까 하오. 이 아이는 가엾게도 세심했던 것이오. 혹시라도 거스름돈을 먹게 될 수 밖에 없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우리의 욕설과 비난을 묵묵히 받아낸게요."


그는 다시 나직이 내뱉었다.


"알고리즘이 병X이네."


탓을 할 부분이 아닌 것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뱉어내야 했음에 틀림없다.


소요되었던 유희는 끝났고 우리는 다시 자아없는 사물과 같은 존재로 돌아갔다.

예비군 입영훈련 2일차에 일어났던 일이다.









p.s.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해서 그랬는지 저 사건 후에는 더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 어쩔 수 없는 예비군이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