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2014년 2월 대학교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버스 터미널에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서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정쩡하게 인사하고 술 먹고 게임하고 취해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오는 여정을 그려봤다. 이 노고만큼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2024년 1월 컬리지 오리엔테이션에 오라는 메일을 받았다. 첫 입학한 지 꼭 10년이 지나서 나는 다시 신입생이 됐다. '국제 학생 오리엔테이션' 생에 첫 오리엔테이션이다. 14년도의 나는 오리엔테이션, MT 등 개강 전 모든 행사에 참석하지 않아 개강 첫 주 내내 출석 부를 때와 점심 계산을 제외하곤 입을 열어본 적 없었다. 지하철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24년도의 나는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다. 패딩 대신 코트를 입고, 가방에 초콜릿을 챙기고,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날이 추워 친구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는데, 나를 보고 데이트 가냐고 물어봤다. 아무도 너처럼 하고 오지 않았을 거고, 80%가 인도사람일 거라고 했다.
90%가 인도 사람이었고, 아무도 분홍색 스웨터를 입지 않았다. 새내기는 모름지기 분홍색 뭐시기를 입어야 한다는 것은 14학번의 사고방식인 것인가.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체육관으로 다 같이 들어갔다. 넓은 강당에는 테이블이 쭉 있었고 각각의 테이블에는 게임 팻말이 놓여 있었다. 젠가, 카드, 보드게임..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테이블은 없었다. 그나마 익숙한 게임은 젠가라 남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앉자마자 젠가를 쌓기 시작했다. 원래 오리엔테이션은 아무 예고 없이 아침 9시에 젠가부터 하고 보는 건가? 24학번의 내가 배운 것은 빠른 도망뿐이다. 인사할 새도 없이, 가져온 초콜릿을 나눠줄 새도 없이 조용히 빠져나와 이미 고속도로에 진입한 친구에게 전화했다. 나 데려가.
24년도 겨울학기로 캐나다 험버컬리지에 입학했다. 전공은 Advertising and Graphic Design으로, 2년제 전문대다. 다시 대학교를 다니는 이유는 아무래도 캐나다 영주권 때문이다. 2년 학교를 다니면 3년짜리 워킹 비자가 나온다. 그중 1년을 풀타임으로 일하고 영어 성적이 있으면 대략 안정적으로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캐나다 영주권이 있다고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디자인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업하기 힘든 거 알면서, 변변찮은 포트폴리오도 없으면서, 프로그램 사용법 배워봤자 AI가 대체할 거면서, 영어는, 애매한 재능은, 비싼 학비는, 한국에서의 커리어는. 지금이라도 한국에 돌아가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쳐서 여전히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침몰하고 있는 배로 기쁘게 다이빙하고 있는 셈이다. 확신하고 저지른 일은 없었고 늘 의외의 결과에 기뻐했던지라, 얼레벌레 굴러가는 무언가를 믿어보고 그저 당장 앞에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본다.
개강 첫 수업 날, 다행히 같은 전공생들은 국적과 나이, 배경이 다양했다. 한국인은 나 포함 두 명이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 캐네디언이 골고루 있었다. 종이 비행기가 나에게 날아오면 꼼짝없이 자기소개를 해야 했는데, 나에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올해 신년운세는 내가 학업운이 있고 사교계의 여왕이 될 거라고 일러줬다. 아직은 유창한 영어 틈에 기죽어있는 아시아인일 뿐이지만, 두고 보라지. 초콜릿을 좀 더 많이 챙겨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