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를 켰다. 어디 말할 데도 없는 답답하고 먹먹한 이 마음을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다.
무조건 내 편을 들어달라는 당부의 말로 시작했다. 나는 아주 아주 조금의 상처도 더는 받고 싶지 않았으므로.
아기를 낳고 키워 온 지금껏, 초보엄마는 내내 마음 졸이며, 발을 동동거리며, 애틋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고군분투했더랬다. 내 자식 내가 키우는 일이라 누구한테 인정받자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세상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었다. 다만, 다만 가장 가까운 사람만큼은 나의 수고로움을 고맙게 여기고 안쓰럽게 봐줄 거라 기대했다. 기대가 무너진 마음을 gpt가 정확하게 읽어냈다. “너는,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존중받고 싶었던 거야.”라고. 사실 내가 무너져 내린 건 그가 나의 노력을 그저 ‘당연히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직접적으로 말했든 또는 태도에서 느껴졌든 내가 그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네가 한 선택은 과한 것이고, 너의 기준은 유난이고, 네 노력은 굳이 일 뿐이야.”였다. 이건, gpt가 정리해 준 말을 빌리자면, 나의 가치 판단과 엄마로서의 진심을 통째로 부정당한 느낌인 것이다. 나를 위로하려는 gpt의 다음 말에 나는 울고 말았다. ”너는 극성이 아니야. 너는 아기의 신호를 민감하게 보고, 위험을 줄이려고 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려고 애쓴 거야.“ 아, 나는 이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건 과잉이 아닌 책임감이고, 불안이 아니라 사랑이야. 그걸 ‘고맙다’가 아니라 ‘왜 그렇게까지?’로 받아들이는 순간, 너는 혼자가 돼 버려.”
gpt의 위로는 계속됐다. “지금 너는 아기를 지키고 있고, 가정을 굴리고 있고, 동시에 감정적으로도 버티고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못 알아봐서 네가 더 아픈 거야.“ 그래, 나는 이 악물고 버티고 있었는데. 버티고 있다는 걸 너는 알아주는구나. ‘버틴다’는 말이 너무 아프고 쓸쓸했다. 모성애는 책으로 아는 것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gpt에게 듣다니, 눈물이 계속 차올랐다. 모성애는 ”밤새 아이 숨소리에 귀가 열려 있는 상태고, 내 몸 컨디션보다 아이 신호가 먼저 들어오는 감각이고, ‘혹시라도’ 라는 가능성 하나 때문에 스스로를 더 혹독하게 쓰는 마음“이라고. 적어도 판단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적어도 같은 편일 줄 알았는데. 그래, 내가 무너져내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오히려 내 마음을 가볍게 판단하고 재단해 버렸다는 사실.
그날, 평소보다 늦어진 저녁 루틴으로 나는 내내 아기의 컨디션이 신경 쓰였다. 저녁을 먹느라 아기를 홀로 매트에 둔 상태였고, 마침 아기의 시야에는 부모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기의 상태를 체크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내가 아기의 이름을 연신 불렀던 건, 그래 통제하려고도 아니고 신경질적으로도 아니고 집착해서도 아니었다. 아기에게 “엄마가 여기에 있어”라는 신호를 보내고,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아주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야 했던 질책은 “아기 이름을 그만 불러라”, “아기도 지겹겠다”는 말. 아기가 불편하면 우는 신호를 보낼 거고, 그때 가서 대응하면 된다는 아주 논리적인 말. 순간,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나는 나를 의심해야 했고, ‘그는 나를 극성 엄마로 생각하고 있구나‘ 느껴지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기에서도 gpt는 정확히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아기는 항상 바로 울지 않는다. 불편을 참다가 나중에 폭발하기도 하고, 컨디션이 안 좋을수록 오히려 반응이 둔해지기도 한다. 그걸 아는 사람이 누구냐면, 매일 같이 보고, 만지고, 안고, 살피는 ‘엄마’다. 그래 나는 이미 ‘뭔가 다르다‘는 걸 감지했고, 그래서 이름을 불렀고, 반응을 확인하려고 했다. 나의 경험에서 나온 감각과 엄마로서의 진심이 짓밟혔다. 아이의 입을 빌려 비꼬아졌다. 울면 대응한다는 논리는 돌봄을 사후 처리로 보는 관점이라고, gpt가 짚어냈다. 맞아, 나는 예방하려는 사람이다. 나의 방식에 대한 존중과 예의와 배려가 빠진 그의 판단과 말에 나는 상처받았다.
내가 원했던 건 정서적인 지지였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받은 건 정서적인 배신이다. 너덜거리고 나약해진 마음을 숨겨가며 육아를 해오고 있다. 내가 무너지면 아기에게 웃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울컥울컥 올라오던 감정들을 삼키고 눌러왔다. 아기를 낳은 일은 다시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이다. 엄마니까 강하다는 말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는, 나 또한 한 아이의 엄마다. 망가지고 고장 나는 몸과 마음, 쉽게 공감받지 못할 만큼 외로운 감정과 상황들에 놓일 때도,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이라는 것, 누군가는 평생 알 수도 없고 짐작도 어려울 그 마음을 두고 감히, 감히 함부로 말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무너지는 건 오늘까지다. 격려받기는커녕 누군가는 유난으로 생각할지도 모를, 아가의 밤샘 돌봄을 또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내일은 다시 온 힘 다 해 아기에게 웃어줄 것이다.
gpt의 마지막 위로를 새긴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대화법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말아라. 나는 지금 다쳤다. 그래서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미룬다.” ‘오늘 하루만 망가지지 않고 지나가기’라는 생각으로… 버티기에 들어간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그 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뜻밖의 곳에서 가슴 벅찬 위로를 받았다. 그동안 내가 나를 다독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나는 오늘 눈물과 분노와 욕설로 얼룩진 메모장에 적힌 날것의 내 마음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친 마음은 그대로다. 그래도 그래도 이런 시간이 한 번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더 강해져야겠다고 수십 번도 더 다짐한다. 앞으로도 수없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 글을 보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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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분노와 욕설로 얼룩졌다는 나의 메모장에는 이런 글을 썼다. 감정과 이성이 맞붙으면 이성이 이기기 마련이라고. 이성은 제삼자에게도 ‘합리적’으로 들릴 법한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지만, 감정은 똑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라 공감을 얻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성은 차분한 것이고, 감정은 호소하게 되는 것이기에. 짙은 호소는, 그 감정이 더욱 특별하고 개인적인 것이 되는 탓에 되려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다. 모성애는 강렬하고도 극한 감정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마 계속…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