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issance x 소설 <채식주의자>
영어 단어 guilty와 pleasure을 합친 신조합성어가 있다. 흔히 ‘길티 하다’라고 표현되는 이것은 죄책감이 느껴지는 쾌락을 일컫는다. 예컨대, 시험기간에 딴짓을 하거나, 다이어트 중에 참지 못하고 고칼로리 음식을 과다 섭취하는 등의 행위가 있다. 이처럼, 사회상규 혹은 법률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독특한 취향 혹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없는 취미를 할 때 느끼는 쾌락을 “Guilty Pleasure”라고 하는 것이다. 라캉의 철학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주이상스(Jouissance)”이다. 단순히 즐거움을 넘어서, 자기를 해칠 수도 있는 과잉된 경험, 때로는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는 쾌락, 금지된 즐거움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관음증이라던가,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지나친 자기희생, 자해 등이 속한다.
주이상스는 라캉의 욕망이론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라캉에게 욕망은 결핍을 채우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욕망이 금기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경험하게 되는 것이 주이상스이다. 라캉은 인간의 정신구조를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의 세 차원으로 나눈다. 언어와 규범의 세계인 상징계에서는, 금지를 규정하고 질서가 존재하여 주이상스가 억제된다. 그런데 상상계에서는 타인의 이미지, 외부의 시선과 기대를 반영해 형성된 자아가 존재한다. 즉, 환상의 나를 실제의 나와 혼동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개인은 타인의 시선으로 구축된 자아와 실재의 자아와의 괴리를 느끼고, 환상 속의 나를 실현하기 위해 고통스럽고 자기 파괴적인 방식의 쾌락, 주이상스가 나타나는 것이다. 실재계는 상징계 질서를 뒤흔들기도 하는 파괴의 차원이다. 이것들은 상징계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 못한다. 욕망이 지나치게 격렬해서 상징계를 넘어서 실재계에 도달할 때, 주이상스가 발생한다.
라캉의 주이상스를 잘 반영하고 있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미셸 푸코의 ‘몸의 정치학(biopolitics)’과 크리스테바의 ‘혐오 개념’을 결합해 분석하도록 하겠다.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영혜라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식물이 되겠다며 채식을 선언한다. 평범 그 자체였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가족들은 여러 형태로 그녀에게 강압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푸코는 저서 <성의 역사>에서 “권력은 더 이상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삶을 조절하고 신체를 관리하는 생명권력(biopower)”이라고 말했다. 그는 근대 권력이 사람들의 몸과 삶 전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고 본다. 이때 ‘몸’은 권력의 대상이 된다. 근대 사회는 정상적인 신체를 생산하려 한다. 예컨대, 정상체중의 기준을 정하고,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규정지으며,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몸의 규범으로서 이성애만을 구조에 편입시킨다.
다시 영혜로 돌아가자. 그녀는 채식을 선택했다. 정도가 지나친 식이조절로 거식증세까지 보이며 점점 말라가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남편, 부모, 언니 모두가 나서서 억지로 육식을 하도록 물리적, 정서적 강압을 행사한다. 그녀가 육식을 거부하고 식물이 되려는 행위는, 자신의 몸을 더 이상 타인의 권력에 맡기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규율사회에서 원하는 ‘정상적인 여성의 몸’을 파괴함으로써 권력에 저항한다.
극단적인 그녀의 행동은 결국 이혼, 가족의 해체, 병리적 문제를 불러온다. 여기서 크리스테바의 ‘혐오’ 개념이 등장한다. 혐오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질 때, 또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 다가올 때 느껴지는 강한 거부감을 뜻한다. 영혜의 채식은 규범적 여성성과 가족의 기대로부터의 이탈이다. 그 순간 그녀는 ‘타자’로 낙인찍히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체중감소로 인해 여성성을 상징하는 유방의 존재가 옅어지고, 동물성과 식물성이 혼재된 몸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몸을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혐오’이다. 배제해야만 하는 비정상의 영역이 눈앞에 실재화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력한 불쾌감을 호소하며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나거나 그녀를 이용하는 폭력을 저지른다.
영혜는 늘 여성, 아내, 딸, 동생의 몸으로서,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 의해 정의된다. 그녀의 몸은 남편의 소유이자, 사회적 정상성의 기표로 사용된다. 그녀의 육식거부, 자해는 이러한 타인의 시선, 규율사회로부터 자기 몸을 분리하려는 저항의 방식이다. 푸코적 관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체에 녹아있는 권력의 흔적을 지우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남편, 가족, 사회는 이를 혐오의 대상으로 배치한다. 사회가 구축한 ‘정상몸이데올로기’를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혜는 주이상스를 경험하려는 주체이지만, 주위 사람들과 사회가 이것을 거부한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상성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권력구조의 농간인지도 모르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며 포용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이다.
한편, 다원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강조되는 포용력의 관점에서 주이상스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다양성 하면, 배려나 존중 등 정제된 윤리적 용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영혜처럼 무언가 이질적이고, 유쾌하지 않은 욕망까지도 제대로 마주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포용이 아닐까. 전장연 지하철 시위, 퀴어 축제 등 규율사회에서 배척하는 존재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고자 하는 그 지점에 주이상스가 자리할 수 있다. 나아가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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