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irce's semiology x 도마쓰 쇼메이
일상의 평온과 안온한 삶을 일각에 빼앗겨버린 피해자의 일그러진 표정일 수도, 폐허가 되어버린 과거의 번화가일 수도, 떠나간 사람의 몫을 책임질 남겨진 자들이 보내는 추모를 상징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겠다.
도마쓰 쇼메이의 선택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된 캔이었다. 그의 사진집 『11시 02분 나가사키』에 실린 이 작품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분출한 방사능으로 녹아버린 캔을 보여준다. 수많은 방사능 피폭의 참상을 담고 있는 대상들 중에 하필 감정이입이 쉽지 않은 무생물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민족적 당사자성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인류애적 연민과 씁쓸함마저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마쓰 쇼메이는 다큐멘터리적 소재에 은유와 암시를 담아낸 작가로, 보도사진의 서사화를 지양했다. 이러한 그의 작가적 태도를 보았을 때, 그는 원자폭탄이 낳은 현실자체에 감상자가 집중하기를 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제목을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피사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감상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불식 간에 ‘알아볼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린 현실’을 인식하는 행위에 있다. 퍼스의 기호학 이론을 적용해 작품을 해석해 보자.
표상체는 정체가 불분명하여 제목을 확인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피사체, 즉 방사능에 피폭된 캔이다. 해석체는 피사체가 있던 곳에 방사능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의 추론이고, 식별불가능한 피사체가 방사능의 지표(Index Sign)가 된다. 대상체는 표상체가 지시하는 실제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나가사키에 한낱 깡통조차 그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상실’이 일어난 상황이다.
그렇다. 도마쓰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잃어버림’에 있었다. 중립적인 무생물을 피사체로 선택하여 날 것 그대로의 인식을 방해하는 감정의 이입을 최소화시켰다. 그렇다고 비극 앞에 통탄과 씁쓸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순서를 확실히 하고자 한 것이 느껴졌다. 대상체의 파악으로 작가가 사진을 매개로 하여 내뿜고 싶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받은 다음, 감상자의 경험과 배경지식이 그 메시지와 만나 상상이라는 화학작용을 일으켜 그 속에서 주체적으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조국의 아픔을 이렇게도 전달할 수가 있다니. 셀 수 없이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몇 세대에 걸쳐 몸과 마음에 상흔을 남긴 참사를 가장 원초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충격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살아오면서 보았던 참사를 다루는 우리의 사회적 태도와 너무나 괴리되어 부끄럽고 슬펐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인원이 희생된 장소는 귀신이 나온다는 등의 괴담의 발상지가 되고, 꺼림칙한 느낌에 그곳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우회로를 알아보는 일종의 랜드마크가 된다.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비극이 반복되었다는 상투적인 멘트만이 앵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국내의 굵직한 사고(참사)를 떠올려보았을 때, 그 어떠한 사건도 제대로 된 추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이 사고의 정치적 배경과 가십거리, 숨겨진 유착관계, 책임전가,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타자화하며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로 잡을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이와 대조되는 예시로, 뉴욕의 ‘9.11 메모리얼’이 떠오른다.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를 당해 무너진 바로 그 장소에 그대로 추모공간을 조성해 둔 것은 미국이 슬픔을 기억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무너진 쌍둥이 빌딩 자리 가운데로 물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요히 추모에만 집중할 수 있다. 스퀘어 주위를 난간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위에 희생자 분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름의 위치도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같은 칸에 적힌 분들 간에는 접점이나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그룹핑이 주는 의미는 희생된 분들과 그들을 사랑했으나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을 서로 이어주는 기억의 방식이지 않을까 싶다. 비움으로써 슬픔을 정의 내리지 않고, 시선자로 하여금 직접 과거를 대면하고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 진정한 추모의 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방사능에 흘러내린 알루미늄 캔은 비극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시선을 담고 있지 않다. 정가운데에 피사체를 위치시켜 온전히 객관적 상황에 집중하도록 만들고, 궁금증이 씨앗이 되어 맥락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은 상태로 슬픔을 전한다.
그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한편, 도마쓰 쇼메이는 나가사키에 두 개의 시간이 있다고 믿었다. 하나는 원폭이 터졌던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02분, 다른 하나는 그 이후의 시간. 그리고 이 작품은 후자의 시간, 즉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시작된 ‘상실의 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픔을 전달하는 신선하고 본능적인 방식에 놀란 것과 동시에, 국가의 탐욕이 부른 재건할 수 없는 희생을 보았다. 미국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선택도 옳지 않았다. 일본은 과욕을 대가로 너무 큰 것을 잃었다. 전쟁에서의 패배와 식민지배의 강제종식 따위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가치를 잃었다. 그것은 죽음으로 사라진 개개인의 삶이고, 피폭으로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이었고, 역사에 남지 않을 일반 개인들의 순수한 애국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수의 주인공만 등장하는 역사라는 무대 아래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실’을, 쓰임을 다하면 버려져 쉽게 사라지는 캔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찮은 깡통조차 이렇게 망가져 제 모습을 잃었다고, 그러니 국가의 선택 앞에 무력한 개인이 과연 스스로를 얼마나 지킬 수 있었겠느냐고 질문을 던져온다. 도마쓰의 사진은 이렇게 비극을 기억하고 희생을 추모하는 것에서 나아가, 반복되지 말아야 할 과거를 되새길 수 있도록 돕는다.
[참고문헌]
김계원, 2021. “다가올 풍경을 위하여: 1960~1970년대 일본의 도시 사진 연구”,『미술사학』,41호, p.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