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0촌 관계

사실혼과 법률혼, 동성혼 합법에 이르기까지

by 감자부침



‘사람이 온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시구가 있다. 우리 모두는 매일 수많은 일생들을 마주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잠깐의 마주침으로 둔다. 사람은 감정을 나누고 나의 생활을 공유하며 얻는 기쁨의 가치를 아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때로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함께 한다. 물론, 생물학적・역사적 맥락에서 인간은 다른 두 성(姓) 간의 결합을 통해 공동체의 존속과 종의 보존을 도모해 왔고, 필연적으로 지금의 사회도 이러한 결합이 혼인이라는 법적 제도로써 전형적인 가족 형성의 출발점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혼인 개념의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징표는 ‘애정에 기초하여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겠다는 자유로운 의사합치’[1]로, 완전히 다른 두 일생이 객관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 때문에 결합되는 것이 ‘혼인’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감정'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법률혼아닌 결속의 형태들이 존재하고, 또 법 제도상에서 포섭하고 있지 않은 애정에 기초한 자발적인 결합형태가 우리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 전환에 트리거가 되고 있다는 설명과 맞닿아있다. 우리 헌법 제36조 1항에서는 혼인과 가족생활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국가가 이를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혼인이라는 사회적 행위를 법적 승인을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게 하고, 국가로 하여금 이를 바탕으로 공식적인 보호와 지원을 명하는 조항으로, 법률혼을 채택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한편, 법률혼을 제외한 사실혼 등은 생활공동체 형성이라는 사적영역에서의 개인 간의 자발적 선택을 고려했을 때 당연히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고, 국가가 이를 막을 근거는 없다. 사실혼의 경우 단지 혼인신고라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지 않았을 뿐, 혼인의사와 부부로서 생활공동체라는 실질에 있어 법률혼 부부와 차이가 없기 때문에 사실혼 배우자 사이에도 동거・부양・협조 의무가 있고, 부부간의 정조의무를 지켜야 하며, 정당한 사유 없이 사실혼을 파기한 자는 상대방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한다. [2] 만약, 생전에 사실혼이 해소된 경우에는 사실상 혼인관계 기간 중 함께 형성한 재산을 부부재산으로 보아 그것에 관한 청산을 하는 재산분할에 관한 규정을 준용 또는 유추적용하여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 [3] 시민연대계약 체결을 인정하는 프랑스의 경우 계약자 상호가 친족이 아니고, 각자가 혼인관계 혹은 동거계약관계를 맺고 있지 아니한 경우에 동거계약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사실혼은 생활공동체를 형성할 의지로 배타적이고 자발적인 결합을 하여 신뢰와 협조관계를 유지할 의무를 수용하였으나 법적 승인은 받지 않음을 요건으로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혼 등 법 제도 밖에 존재하는 결합의 형태가 법률혼에 준하여 보호받고 있는 입법이 존재하는 한편, 상속권 등에 있어 법적 안정성과 분쟁의 방지를 위해 차별적 취급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더 많다. 한평생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관심이 없던 사람이 민법상 혈족이라는 이유로 나의 재산을 상속받고, 수술이라는 큰 결정에 동의권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무능력상태에 빠지면 나의 후견인이 될 수도 있는 사이. 법적 보호자. 법률상 관계. 이러한 것들이 보장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특히나 사망으로 인한 사실혼관계 소멸의 경우, 제도적으로 상속권을 인정하고 있지 아니한 현 제도는 제도 밖의 사회구성원들에게 가혹하며 지나치게 차별적이다.(유언 등의 예외를 제외함)


가족의 형태가 다양화되고, 흔히 전형적이라고 여기는 남녀 간의 결속인 혼인제도를 선택하기보다, 비혼 또는 사실혼을 비롯한 동거, 동성 간의 결합, 비혼 자녀출산, 미혼자 간의 생활공동체 형성을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고 자유로워진 현실을 그 속에 공존하고 있는 법 제도가 반영하여 변모할 필요성이 있음은 당연하다. 사회구성원들의 생활상은 바뀌었는데, 그 속에서 사는 개인들의 권리와 충돌할 수 있는 문제는 법적으로 여전히 공백상태에 놓여있는 것은 사회적 안정성을 저해한다.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의 근본적 발현이다. 국가는 이를 보장하고 제도 밖에 방치되어 당사자가 겪을 부당한 처우를 줄이고, 제도를 악용하여 건전한 사회질서와 풍속을 저해하지 못하도록 촘촘한 법적 설비를 하여야 한다.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자를 비롯한 동거인을 민법상 ‘배우자에 준하는’ 지위로 규정하는 것은 일정 부분 규정상 한계로 인정하더라도, 우리 혼인제도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동성결혼에 대하여는 따로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최하 수준의 출생률을 기록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에 국가 존속의 의무를 지고 있는 정부는 다양한 저출생 대책을 마련하고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생각건대, 남녀 간에도 혼인하지 않는 경향이 짙어지고, 혼인하더라도 출산을 선택하지 않는 추세에 이른 지금, 국가에서 동성 간의 결혼을 법적 제도화 하였을 때 각 진영에서 출생률과 엮어 저항의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본다. 기우라고 하기에는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공식적 척도로 인식되는 우리 사법부의 동성결혼 불인정 전원합의체 결정이 이를 보여준다. 대법원은 “무릇 혼인이란 남녀 간의 육체적, 정신적 결합으로 성립하는 것으로서, 우리 민법은 이성 간의 혼인만을 허용하고 동성 간의 혼인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4] 고 판시한다. 불과 10년 전에 비해 성소수자들의 권리보호와 사회진출이 개방되었고, 대중의 인식도 절대적인 거부에서 비롯된 혐오보다는 수용의 태도가 보다 자리 잡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원화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선진화된 모습임을 감안하면, 우리 사법부도 태도를 달리하여 역사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202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동성 동반자 관계의 커플에게 국민건강보험 피양자 자격을 인정하면서, 일정 요건 아래에서 동성 커플도 사실혼에 준하는 생활공동체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결한 진보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동성혼 합법을 적시한 것은 아니다.)


대법원의 판시로 돌아가보자. 남녀 간의 육체적 결합이라 함은 어떤 종류의 것을 지칭하는 것일까. 추측컨대, 생물학적으로 결합하여 자연적으로 자손을 생산할 수 있는 결합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동성 간에 섹슈얼적인 결합이 가능하고, 그들의 성생활을 인정하는 판례[5]가 없지 않다는 점을 볼 때, 대법원의 이와 같은 판시는 적절하지 않다. 정신적 결합은 더더욱 동성결혼을 반대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대법원이 말하는 정신적 결합이 명징하게 무엇인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이는 혼인이 이미 남녀 만의 전유물임을 전제한 상황에서 끼워 맞춘 공허한 근거에 불과하다.

남녀 간의 법률혼만을 인정하는 것은 국가가 특정 형태를 정상적인 가족의 결합 형태로 규정지어 그것에서 벗어나는 형태는 법의 보장범위로부터 제외시키는, 지극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따른 편협하고 차별적인 행태이다. 따라서 국가는 자유로운 혼인과 생활공동체 형성을 보다 넓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김하열, 헌법강의, 2022, p.742

[2] 대법원 1998.8.21. 선고 97므 544,551

[3] 대법원 1995.3.28. 선고 94므 1584

[4] 대법원 2011.9.2.2009스 117 전원합의체

[5] 대법원 2009.9.10. 선고 2009도 3580

매거진의 이전글[칼럼] 동굴에 비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