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동굴에 비친 모습

Rene Girard's The metaphysics of desire

by 감자부침



나는 연예인 D를 좋아한다. 그의 콘서트 예매를 위해 유료 팬클럽에 가입하여 선예매 권한을 얻고, 티켓팅 당일에는 PC방에서 손을 떨며 성공하기를 간절히 욕망한다. 나의 이러한 욕망은 ‘진심’이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는 나의 이 ‘진심’을 ‘모방적 욕망’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인이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라르는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욕망의 매개자(모방의 대상)’을 전제한다. 내가 콘서트에 가고자 하는 욕망은, 다른 팬들이 동시에 그곳에 가고자 욕망하기 때문이고, 나는 그들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아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전도’는 바로 이 ‘모방욕망’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모방욕망이 심화되면, 역으로 매개자가 나를 따라 한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이처럼 욕망의 출처가 타자에서 나 자신으로 전도되는 것을 ‘욕망의 형이상학적 전도’라 부른다.


이제 상술한 지라르의 이론을 일상에 접목시켜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고자 한다.

첫째, 불륜과 모방적 욕망의 관계이다. 애인이 있으면 타인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간단히 말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이때 욕망의 매개자는 애인이 된다. 자 이제, 드라마적 클리셰로, 다른 남자의 여자를 뺏는 불륜이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은 애인이 있는 상대방을, 다른 남자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욕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가면서 자신만이 진정으로 이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시작은 타자(다른 남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었지만, 어느새 자신이 진짜 욕망의 주체라고 믿게 되는 형이상학적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하게 된다. 불륜의 주체가 아무리 욕망의 미러게임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거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불륜도 결국은 유통기한이 있는 관계라는 점에서 본인에게 손해가 발생할 것인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분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은, 욕망의 주체는 모방욕망에 잠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분명 이성적이다. 그렇기에 불륜을 하게 되면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가 발생한다. 나의 행위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과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믿는 것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진짜 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라고 미화하면서 심리적 불편을 줄이는 것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손해가 될 것이라는 걸 알지만, 불륜행위로 얻는 도파민, 불륜을 통해 확인하는 자기애적 보상 등을 통해 본질적인 심리적 만족을 얻는다.


둘째, 타인의 욕망을 통한 자기 욕망의 구성은 비단 성애적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떠한 관계든, 그것이 삼각구도를 형성하는 순간, 욕망은 긴장감과 경쟁심을 유발한다. 영화나 드라마의 삼각관계 클리셰가 존재하는 이유다.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타인이 무엇을 욕망하기 때문에 그 시선이 향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즉, 타인들의 욕망이 얽혀 가치가 탄생하는 것이다. 경제학적 표현인 모방심리도 이 원리에 기인한다. 다수가 원하지만, 소수만이 가질 수 있다는 희소성은 욕망을 만들어낸다. 상품 자체의 효용보다 그 상품을 원하고, 실제로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가 욕망의 트리거가 된다. 가격이 비쌀수록 더 욕망하게 되는 역설을 가리키는 베블런 효과나 대중이 소비하면 도리어 소비심리가 위축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스놉 효과 모두 지라르의 이론으로 설명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이 이렇게나 타인에게 본인의 욕망을 의존하는 존재라면,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건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전부 동굴에 비친 그림자인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종교적 관점과 동양철학에서 구할 수 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대가 없는 사랑(아가페), 즉 비모방적 욕망을 한다. 불교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보아,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본다. 도가는 무위자연을 핵심 주장으로 삼아 타인의 시선, 사회적 잣대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나는 인간이 신처럼 아가페적 사랑을 할 수 있는지, 불교와 도가에서 이야기하는 탈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지라르의 ‘욕망의 형이상학적 전도’를 인식함으로써, 자유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고 자만하는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고, 진정으로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아직 희망은 있다고 본다. 내가 원하는 것조차 진짜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모방욕망을 자각하고 반추하는 능력자체가 어쩌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동물이라는 단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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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에 다녀온 콘서트를 추억하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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