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선순환의 첫 단추

국가는 무엇을

by 감자부침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고대 철학자의 사상 속에 있을 수도, 복잡한 법리에 있을 수도, 최고규범으로서의 가치에 있을 수도 있다. ‘돌봄’이라는 가치가 주목받고, 그것의 공식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조짐이 보이는 지금, 선두에 학계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생각보다 오래된 논의이고, 합리적인 근거로 점철된 논문들이 그간 많았지만, 실제 정치와 행정영역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던 까닭은 국가가 뒤따라가고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대우하고 있지 않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돌보는 의료서비스가 정치공방의 대상이 되었던 현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서 긴급 저출생 대응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2030 세대의 상당수는 출산과 양육에 유인을 느끼지 못한다.


헌법에 돌봄의 가치를 추가하는 것이 막바로 실효를 내지는 못할 수 있다. 현실성을 바라보기 전, 국가의 당해 문제에 대한 선두자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헌법은 좋은 선택지이다. 국가가 천명한 가치가 국가에 의해 퇴색될 때, 국민이 나서서 바로잡아 왔던 역사를 기억한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그러하다. 공적영역에서는 생경하다고 인식되는 ‘돌봄 가치’가 헌법 가치이자 원리로 선포되면, 돌봄이 중추가 되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적어도 정치인 혹은 정책집행자들의 탁상에 공론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묘두현령(猫頭懸鈴)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와 각 영역의 협조가 동시에 이루어져야겠지만, 그림자로 머무르던 것이 양지로 올라왔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편, 헌법에 어떠한 가치를 명문화하는 것은 역사적·사회적 성찰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예컨대, 헌법에 인간존엄을 명문화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제노사이드에 대한 반성으로 인간존엄을 명시화하고 인권을 강조한 역사적 성찰이 반영된 것이다(김희강, 2018). 산업화 이후 노동의 영역과 가정의 영역을 담당하는 사람이 나뉘었다. 주로 여성에게 사적영역의 책임이 할당되었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돌봄 노동의 특성상 시장가치로 환산되지 못했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함께 일·가정 양립이 제도권에 입성하였지만, 여전히 가족적인 문제로 생각되었다. 대한민국이 세계 최하위 저출생 국가가 된 것은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기인하므로, 돌봄을 개인의 책임으로 방기해왔던 정부와 돌봄 부정의에 편승해 돌봄 부담을 연대책임지지 않았던 사회가 반성하는 출발점으로서 돌봄 헌법은 의미가 있다.




국가가 개인에게 베푸는,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존엄한 인간이라면, 공화국의 비지배자유 향유의 주체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권으로서 ‘돌봄’이 존재해야 한다. 시혜적 조치로 보는 것은 불균형한 힘의 역학관계를 극복하지 않겠다는 국가의 암묵적인 인정이다.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인간과 나아가 미래세대를 둘러싼 자연환경에까지 국가와 사회의 돌봄 의무가 인정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 방안으로 이 책에서 택한 것이 돌봄 헌법이다. 첫째로, 규범적 효력과 역사적 맥락을 포괄하고 있는 헌법 전문에 ‘돌봄’ 가치를 성문화한다. 둘째, 돌봄 지원관계에 국가를 둔다.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돌봄 객체와 그를 책임짐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해지는 돌봄 제공자, 돌봄 제공자가 의존하게 되는 제3자(조달자), 이 모든 관계를 관리할 수 있는 제4(규제제도)의 존재에 국가가 편입되도록 한다. 돌봄은 의료, 보육, 요양, 교육 등 가치재(merit goods)20를 포괄하는 상위개념이다. 가치재의 특성상, 정보비대칭으로 인해 서비스의 질과 형평성 보장이 쉽지 않다. 가치재 공급에 있어 공공의 비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방법이겠지만, 당장은 어려우므로 정부의 규제 역할이 중요하다.21 이것이 정부가 돌봄 관계에서 제공자, 조달자, 규제자의 모든 지위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이다. 셋째, 돌봄 불평등의 악순환을 끊고, 선순환의 시작점을 찾는다. 고착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인 돌봄 불이익에 익숙한 환경을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한다. 시장경제질서에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이 작동할 수 있도록 국가의 규제적 역할을 선언하는 것이다.


‘돌봄’을 신(新) 가치로 상정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엄연히 사회의 시각에서 그러하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돌봄은 보편적이고 오래된 가치이다. 돌봄이라는 주춧돌 덕분에 높고 넓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음을 망각한 것일 뿐, 우리 인생의 4할은 누군가의 돌봄이었다22. 사회에 인적자원을 공급하고, 사회로부터 방출되고 배제된 인간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은 돌봄 제공자와 조달자가 있는 덕분이다. 돌봄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활발히 진행 중인 지금, 헌법에 그 가치를 명문화하는 것은 상징적이지만 필수적 선행절차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여성의 일로 취급되던 가사노동을 돌봄 노동이라는 용어로 자유시장경제에 편입시켰다면, 이제는 돌봄의 근원적 특성 때문에 경제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성과산출의 어려움 때문에 부가적 논의로 밀려나지 않도록 최상위 규범인 헌법에 천명할 차례다.








20 모든 사람이 일정 수준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재화(김태일, 2013)

21 op.cit. p.186-187.

22 나경희, ‘우리 인생의 4할은 누군가의 돌봄이었다.’, 시사IN,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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