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 번째 이야기
우리 사는 세상은 더 빨리, 더 많이, 더 잘하라고 사람을 재촉합니다. 한때 주 69시간이니 60시간이니 했던 논쟁도 결국은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얼마나 더 생산할 수 있는가 입니다.
사람은 일하고 경쟁하고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그 모든 움직임의 바닥에는 사실 하나의 소망만 깔려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
그런데 행복은 참 이상합니다. 원하던 것을 이루면 기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다시 부족해 보이고 다시 불안해지고 다시 더 큰 자극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는데 이상하게도 애쓸수록 점점 더 불행해집니다.
노자는 이 불안의 뿌리를 단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만족을 모르는 것만큼 큰 화는 없다고.
이 말은 오래된 지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보내는 현대어 경고처럼 들립니다. 더 가지려는 열망이 결국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는 것으로요.
노자는 시대의 도(道)를 말의 쓰임으로 구별합니다.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달리던 말이 밭으로 돌아가 거름을 나릅니다. 힘이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도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병마가 들판에서 새끼를 낳습니다. 전쟁터가 삶의 자리가 되어버린 사회입니다.
'화’와 ‘허물’은 모두 욕망이 과열될 때 생겨납니다. 만족을 모르는 마음은 끝없는 결핍의 순환을 만들고, 얻으려는 집착은 관계를 소모시킵니다.
노자가 말한 ‘만족을 아는 만족’은 체념이 아닙니다. 적당히 포기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리듬을 다시 맞추는 균형의 지혜입니다. 행복은 기쁨의 총합이 아닙니다. 기쁨은 사건이지만 행복은 구조입니다. 한 번의 성취는 곧 익숙해지지만 만족은 세상을 해석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오래 남습니다.
오늘의 불행은 결핍보다 비교에서 시작됩니다.
자본주의는 만족하지 않도록 설계된 시스템입니다. 사람이 만족하는 순간 경제는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조금만 더’라는 중간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욕심이 더 낫게 사는 지혜로 바뀌려면 한 가지 전환이 필요합니다.
속도의 멈춤.
마음의 중립.
노자가 말한 도는 움직임과 멈춤, 채움과 비움이 서로를 살리는 균형의 리듬입니다. 그 리듬을 잃으면 말은 밭을 떠나 전장으로 달려갑니다. 오늘날의 전장은 회사이고 경쟁이고 SNS이고 그리고 나 자신입니다.
성경은 만족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평안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우리의 만족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그는 감옥에서도 노래했고 결핍 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그 만족은 상황을 초월한 자족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만족은 얻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들, 즉 은혜를 기억하는 능력입니다. 변하는 것에 마음을 걸면 변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족은 지금 여기서 숨 쉬게 합니다. 노자가 말한 도의 질서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며 우리를 살리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고, 더하는 것이 아니라 멈출 줄 아는 데서 피어납니다.
더 가지려는 마음은 결국 나를 잃게 합니다. 비워두어야 생명이 숨 쉽니다. 말이 밭으로 돌아올 때 세상은 평화를 회복합니다. 만족을 아는 마음이 곧 도이며, 자족을 배우는 사람은 이미 복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