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번째 이야기
살다 보면 내가 가장 잘하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이 멈추고 누군가가 대신 수습해 주는 순간. 그때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분노입니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가. 나 자신을 향한 분노이자 나를 대신한 사람을 향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됩니다. 그 분노의 바닥에는 완벽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빈틈이 있으면 무너질 것 같고, 흠이 보이면 끝난 것 같고, 모자라 보이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는 그 공포.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정확해야 하고 더 완벽해야 한다고. 하지만 노자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크게 이룬 것은 모자란 듯하고, 가득 찬 것은 비어 있는 듯하다고. 진짜 완성은 늘 여백을 남긴다고. 틈이 있으니 닳지 않고, 비어 있으니 다시 채워질 수 있다고. 곧아 보이는 것보다 휘어질 줄 아는 것이 오래 가고, 유창한 말보다 더듬는 말이 진실에 가깝다고.
노자가 말하는 완성은 반짝이고 사라지는 마무리가 아니라 지속되는 쓰임입니다. 완벽함이 아니라 버텨낼 수 있음 입니다.
삶의 질서는 결함이 없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함을 견딜 수 있어서 유지됩니다. 관계도 그렇습니다. 말이 많아질수록 사이는 얇아지고, 침묵이 있을 때 마음은 오래 남습니다.
완벽주의는 완성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라 결핍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고 끊임없이 자신을 평가합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비워야 오래 간다고. 굽힐 줄 아는 곧음, 서툰 듯한 솜씨, 모자라 보이는 완성, 그것이 삶을 부러뜨리지 않는 구조라고.
기독교 신앙도 이 지점에서 멈춥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흠 없는 인생이 아니라 비워진 인생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완성의 상징이 아니라 결핍의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비움 속에서 사랑이 완성되었고 그 결핍 속에서 구원이 채워졌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벽이 아니라 변화라고.
넘어지는 자리에서 다시 빚어지는 삶. 노자가 말한 ‘맑고 고요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방해하지 않는 마음의 자리입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삶은 다시 자기 모양을 찾습니다.
진짜 완성은 여백을 남깁니다. 비워야 채워지고 굽혀야 오래 갑니다. 허술해 보이는 자리에서 삶은 오히려 단단해지고 그 고요한 틈 사이로 하나님의 손이 다시 우리를 세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