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주절주절

by 이지

한 소식을 들었다.
학부 때 함께 공부하던 동기였다.

교회와 선교, 교육을 위해 부지런히 살던 친구였다.


그런데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고,

며칠째 의식이 없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하이고야…'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다른 말이 이어졌다.
“죽으면 죽으리라.”
“차라리 타오르듯 살다가 사라지자.”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말들이었다.


믿음의 결단, 헌신, 순교.
어쩌면 그런 말들이 너무 쉽게 이어졌다.


그런데 문득 멈췄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마 우리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천국에 갔다고.


그런데 그 순간,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그럼 남겨진 사람들은?


아버지가 사고로 사지마비가 되었을 때,
그 시간이 10년이었다.

그건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떤 ‘신앙적 수식어’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였다.


누군가는 금방 떠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오래 남아
주변 사람들의 시간을 함께 붙잡는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당사자의 믿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예전에 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회에서는 그를 영웅처럼 기억했다.
뮤지컬로 만들어지고, 장엄하게 재현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순교했고

그 가족은 오랜 시간 힘들게 살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다시 불려 나왔다.


그 순간 느껴졌던 감정은
존경이라기보다 어딘가 불편한 감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죽음을 말할 때 자꾸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의 믿음, 그의 선택, 그의 마지막.


하지만 죽음은 그 사람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길게 이어지는 시간이다.
돌봄의 시간, 견딤의 시간,
말로 설명되지 않는 시간.


그래서 어떤 죽음은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
그 뒤에 이어지는 시간을
너무 쉽게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신앙은 종종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을 충분히 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도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남겨진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있었고, 흩어진 제자들이 있었고,
두려움 속에서 시간을 견뎌야 했던 공동체가 있었다.


그래서 부활의 이야기는
죽음을 이긴 개인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쩌면 신앙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보다
“남겨질 사람들을 어떻게 남겨둘 것인가”까지
함께 묻는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동기의 소식을 들은 뒤,
여전히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그저 한 가지 생각만 남았다.
죽음은 당사자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너무 쉽게 한쪽만 말해왔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그 친구가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남겨질 사람들의 시간을
조금 더 오래 생각해보게 된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예수가 소망이다”라는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 소망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를 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는 것이 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