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은 늘 그렇듯 느닷없이 찾아왔다.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몇 번의 ‘계기’로 찾아왔습니다.
너무 모범적인 예시부터 이야기하자면, 디자인 연차가 스무 해쯤 쌓이자
그 경험을 나누는 일들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흘러가는 파이프라인을 세 가지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강의,
하나는 심사,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출판이었죠.
또 다른 계기는 박사논문을 쓰던 시절 찾아왔습니다.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박사과정이 잘 맞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논문은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지도교수님이 쓰고 싶은 글을 대신 써주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100%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교수님이 원하는 글을 쓴다는 건,
그 사람의 머릿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과 같았습니다.
아니, 내가 내 속도 모르는데
어떻게 교수님의 속까지 알겠습니까. 허허허허허.
저는 삽질과 노가다에는 꽤 재능이 있는 인간이었지만,
남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에는 완전 십점짜리 인간이라는 걸
박사과정 시절 깨닫습니다. (빵점은 아니었겠지.)
결국 수없이 논문을 붙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한 끝에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아,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그래서 버렸습니다. 정말로.
쓰던 논문 원고를 돌돌 말아 겨울부츠 속에 넣어
‘부츠 심지’로 써버렸습니다. 허허허허허.
논문을 버린 여자. 그게 저였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내가 잘 쓰는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자라납니다.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박사 코스웍 시절 함께 다니던 언니가 있었죠.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이모티콘을 만들고 동화책도 쓰는,
왕성하게 사회활동하던 저보다 열 살 많은 언니였습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노란 웨이브 머리를 한
소녀 감성의 소유자.
어느 날 그녀가 너무나 쉽게 말을합니다.
“너도 책 써봐. 할 얘기 많잖아.”
저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습니다.
“내가 책을? 써? 썼다 쳐! 그다음엔 뭘 어떻게 해?”
언니는 너무나 단호하고도 가볍게 대답합니다.
“원고를 출판사에 돌려야지! 관심 있으면 내줄 거고, 아니면 말고!”
완전 그러시던지 마시던지의 말투.
그녀의 책은 정말 순조롭게 나왔습니다.
뭐 물론 내막은 작가 말고는 아무도 모르겠지만요.
그 생각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습니다.
‘나도 한번 해볼까?’
이 세 가지의 스토리가 제 삽질 여정의 동기이자 시작점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