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수정의 시간

초고를 비우며 배우는 것들

by 비심플

파트1부터 파트4까지 초고를 모두 완성했을 때, 나는 막연히 200페이지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써온 시간과 에너지를 떠올리면 그 정도는 충분히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파일에 찍힌 페이지 수는 150페이지에도 미치지 못했다. 생각보다 얇았다.

분량이 부족하다는 사실보다, 내가 쓴 글의 밀도가 그 정도였다는 사실이 좀 충격으로 다가왔다.

초고 중간 무렵이였을까? 브런치에 가입하게 되면서 초고와 브런치 연재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브런치 연재를 의식하면서 글의 호흡이 짧아졌고(과도한 엔터 남발), 꼭지마다 마무리를 빠르게 지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브런치에서 캐쥬얼하게 읽힐 수 있는 인기글이 되고 싶었고 그 의도가 한없는 유치함으로 이어진 것도 같다. 뭐, 읽히는 글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책으로 묶기에는 아무래도 가벼운 부분이 적지 않달까...


초고를 출력해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기대보다는 점검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몇 장 넘기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이건 수정의 문제가 아니라 재정리의 문제라는 것을.

잘 썼다고 생각했던 문장이 과하게 느껴졌고, 감정이 앞선 문단은 힘이 빠져 보였다.

혼자 벅차 있었던 흔적도 보였다.


무엇보다... 이 글을 내가 아는 사람들이 읽는 장면을 상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결국 여러 꼭지를 다시 썼다. 일부는 통째로 들어냈고, 일부는 구조를 바꾸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덜어낼수록 글이 선명해졌다.

문장이 줄어들자 메시지가 또렷해졌고, 감정이 정리되자 의도가 분명해졌다.


20260302_205255.png 초고를 출력해 한 줄씩 다시 읽어 내려가던 밤


그 과정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작가는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고쳐 보는 사람이라는 것.

지금은 수정본 ver1을 마친 상태다.

출판사에 보내기 전, 교정교열을 위해 출력해 다시 읽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타도 적지 않게 발견하고 있다.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이게 그대로 책으로 나왔다면?’ 하고 잠시 상상해 보면 또 다시 얼굴이 화끈거린다.

초고를 쓸 때의 나는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수정의 시간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완성은 한 번에 도달하는 지점이 아니라, 여러 번의 부끄러움을 통과한 뒤에야 조금씩 다가오는 상태라는 것을.

아직 부족한 부분은 많다. 당연히.


그렇지만 분명한 변화도 있다.

초고를 다 썼을 때보다,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냉정해졌고,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

원고를 고치는 시간은 결국 글을 다듬는 시간이 아니라,

나의 기준을 다듬는 시간이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7화글이 안 써질 때, 오늘도 삽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