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한 하루에 붙이는 이름
제 책 계약을 할 때,
대표님께서 웃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작가님, 이 책은요
디자이너보다는 디자인 관계자분들이나 학생들이 더 많이 읽게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최대한 조카—중고등학생이 읽는다고 생각하고
쉽게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계약 이후에는요,
원고에 대한 부담이 전보다 훨씬 크게 다가올 거예요.”
그리고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며 덧붙이셨죠.
“원고 입고일이 됐는데도 원고가 안 와서 연락을 드리면
‘집에 불이 나서 원고가 다 타버렸다’거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컴퓨터만 쏙 가져갔다’는
황당한 대답을 하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어요.
“정말요?
그렇게 뻔하게 들통날 거짓말을 한다고요?
아니, 그럼 원고를 못 보내면 이후 프로세스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 와중에 절차부터 체크)
그러자 대표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셨어요.
“예전 같으면 위약금도 있고 절차가 복잡했는데요,
요즘은 그냥 계약금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작가님이 글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면
원고가 정말 안 나와요.
그러니까 초고 쓰실 때처럼,
최대한 편하게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계약이 끝난 다음 날부터 원고를 다시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고는 이미 다 써둔 상태라 3개월 동안 원고를 다듬어
봄에 보내는 게 지금의 계획이에요.
제가 정말 루틴대로 사는 인간이라
새벽에 일어나 집을 청소한 뒤 노트북을 켜고 원고를 씁니다.
커피 한모금을 마시면서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며 글을 쓰는 시간.
그 시간이 하루중 제일 소중한 시간이에요.
원고에 대한 중압감은 대표님께 설명 들었던 사례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고요.
매일 원고 쓰는 시간이 감사하다. 소중하다. 그 생각은 합니다.
원고는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어요.
목차의 꼭지 자체가 딱딱해서 아무리 애써도 재미없게 느껴지는 글이 있고,
제 사례를 녹여냈더니 ‘이건 읽다가 공감 많이 받겠다’ 싶어서
혼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어요.
지금은 수정본의 50%를 완성한 상태입니다.
안 되는 날은 굳이 더 애쓰지 않고 조용히 모니터를 덮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루 종일 글만 쓰고 있으면 저만의 세계에 갇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어요.
글을 쓴다는 건 중독성이 있는 일이기도 해서,
요즘은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몸을 쓰는 집안일을 하다 보면
머릿속도 함께 환기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머리를 쓰는 일과 몸을 쓰는 일의 비중을 비슷하게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몸을 써야 멘탈도 같이 건강해지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요즘 하나 더 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디자인 수업을 듣고 있어요.
교수가 왠 아카데미냐 싶을 수도 있지만,
툴이나 기술만 놓고 보면
아카데미만 한 곳이 없더라고요.
(역시 한국은 학원인가요.)
기술은 계속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저도 한 번쯤은
제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생 신분으로 다시 앉아
설명을 듣고, 선을 따고, 컬러를 입히고 그렇게 손을 움직이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글을 쓰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디자인 수업을 듣다 보면
‘아, 이건 책에서 이렇게 풀어야겠다’ 싶은 문장이 떠오르고,
강사의 설명 하나를 들으면서도 ‘이런 표현 괜찮은데 책에서 어떻게 써먹지’ 싶을때가 있어요.
글이 막힐 때 억지로 책상 앞에 붙잡혀 있는 것보다,
전혀 다른 결의 공부를 하면서
머리를 한 번 비워주는 게
오히려 연결고리가 생기는 느낌입니다.
예전에 브런치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글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하고,
번번이 미끄러질 때마다
하루를 통째로 삽질한 기분이 든다고요.
그 글에 어떤 작가님이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작가님 오늘도 한 삽, 한 삽 수고하셨어요.
한 삽 한 삽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근사한 책이 완성돼 있을 거예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하루가 아니라,
그래도 땅을 파고 내려간 하루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요.
그날 이후로 저는 ‘삽질’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쓰게 됐습니다.
헛수고의 다른 말이 아니라,
조용히 애쓴 하루에 붙이는 이름으로요.
오늘도 글은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노트북은 열었고,
한두장은 남겼습니다.
오늘도 한 삽.
크지 않아도, 깊지 않아도
분명히 앞으로 나아간 하루.
이렇게 쌓인 시간들이
언젠가는 문장이 되고,
정말로 책이 되겠죠.
오늘도 삽질입니다.
수고한 하루였다는 뜻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