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보이는 사소한 것들(완결)

그 남자와 우도에 고립되다

by 지윤
[지난 이야기]
(중략) 4박 5일의 우도 고립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 하루 만에 나가려고 했던 이 섬에서 풍랑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아 꼼짝없이 갇혔고 모르는 이의 죽음을 목격한 후 나와 그 남자는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곳을 탈출한 후 우리 눈앞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성산항 주차장에 묶여 있던 나와 그 남자의 렌터카. 장기 주차를 한 탓인지 주차장 요금은 예상보다 대단했다. 하지만 주차 요금 정도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청난 사연이 있는 그 섬에서 드디어 탈출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해방감' 외에 그 어떤 감정도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탈출했다는 기쁨과 더불어 성산항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는 것은 하얀 눈이었다. 성산항을 나오니 곱디고운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한 겨울에도 눈을 볼 수 없는 경상남도에서 온 나와 그 남자에게 눈 덮인 제주도는 아름다운 풍경 그 자체였다.


이런 풍경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나와 그 남자를 우도라는 섬에 오래 묶어두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20250206_095541.jpg 눈 오는 풍경의 광치기 해변

여태 우리에게 닥쳤던 시련들 못지않게, 눈앞의 풍경 또한 비현실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고 있자니, 춤이 절로 나왔다. (몸치였지만) 나와 그 남자는 펑펑 눈이 오는 성산의 한 거리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이 찾아와 아무도 몰래 멀리 떠나자
아침 햇살이 우릴 비춰도 계속 춤추자 너를 사랑해

우린 낭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우린 젊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우린 사랑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린 괜찮을 거야
-낭만젊음사랑(이세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여행 와서 정말 고생 많았다."

"맞아.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나도.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이야."



20250206_094838.jpg 성산일출봉 앞의 해무와 하얀 눈 그리고 초록 이끼

나와 그 남자의 첫 데이트이자 첫 여행이었다. 사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기였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다른 커플들과 달리 나와 그 남자에게는 초장부터 시련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처음에는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에 겪지 못했던 일들을 이렇게 한 번에 겪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려던 숙소의 전신주가 무너지고, 섬에서 나오는 배가 끊기고, 모르는 이의 죽음도 목격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러나 곱씹어 볼수록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그 남자와 함께라면 어떤 일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천천히 겪고 천천히 알아도 좋지만, 처음부터 알아도 나쁜 건 없었다.


특히나 그 남자와 함께라면 더욱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가에 핀 들꽃, 아침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 등 나는 사소한 곳에서 행복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좋은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마구마구 표현하는 편이다. 내가 느끼는 행복함을 나누면 또 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나보다 더 사소한 곳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비가 세차게 내려 우산이 뒤집혀도 마냥 즐거웠고, 나만은 비에 젖지 않게 하려 애썼다. 또 비록 가려던 멋진 숙소는 갈 수 없었지만, 대안으로 가게 된 숙소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늘 밝고 해맑기만 한 그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상황처럼 당황한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든든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20250206_120057.jpg 둘쨌날 가고 싶었던 북카페에 결국 마지막 날 갈 수 있었다. 이것도 우도의 행운이라고 할까나.

비록 의도치 않게 우여곡절이 많아진 첫 여행이었지만, 이렇게 그 사람의 장점을 여러 방면에서 알게 되어 정말 뜻깊은 여행이었다. 우리가 겪은 수많은 일들을 토닥이기라도 하듯 제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북카페 <바라나시>에서는 위와 같은 문장을 선물 받았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 덕분에 나는 그 남자를 더욱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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