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시간 속에 익어가던
심심할 땐 핸드폰을 들고 이것저것을 눌러본다. 스치듯 지나가며 빠르게 훑어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휘리릭.
며칠 전 그렇게 휘리릭하며 시간을 보내다 '자산'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나의 모든 금융자산을 한 번에 알려준다는데, 사실 믿어본 적은 거의 없다. 역시 시간 휘리릭으로 무심코 눌러본 순간 '신협 출자금 36만 원.'
아무리 기억해 내려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유명하고 똑똑하던 사람들이 TV에서 늘 하던 '기억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단칼에 치부했던 거 죄송합니다. 정말 기억 안 나요.
아직은 치매나 혹은 교통사고로 인한 기억상실 같은 걸 염려할 상황은 아니다.
신협 출자금 36만 원이 떠 있는 휴대폰 화면을 캡처했다. 그리고는 바로 신협에 찾아갔다.
은행원에게 조심스레 신분증을 내밀고 휴대폰 캡처 화면을 보여주며 사실 확인을 부탁했다. 이게 뻥이라면 은행 앱이 잘못한 걸 텐데 그걸 신협에 와서 확인해 달라는 나 스스로가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그날 난 도서관에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고 신협은 바로 옆에 있었기에 난 꿈과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갈 수밖에.
내 신분증과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직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되묻는다.
직원: 출자금으로 36만 원이 있으시네요. 어떻게 해 드릴까요?
나: 다 현금으로 찾을 수 있나요?
직원: 네. 현금으로 드릴까요? 다른 계좌로 넣어 드릴까요?
나: 현금으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친 후 내겐 생각지도 않았던 현금이 내 손에 들어왔다.
꿈이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 난 써니에게 '핸드폰 줘 봐.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우리 돈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우리'를 특히 강조하면서 써니의 자산을 추적했다. 몇 번의 인증 결과 '신협 출자금 198만 원'
어라, 웬 횡재지. 역시 우리를 강조하길 잘했다.
내가 인출할 땐 아무 생각 없이 갔기에 통장 발급을 새로 받았다. 1,000원 주고. 꼼생이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장롱 속 깊이 묻어 두었던 보물상자를 열어 봐야겠다. 혹시 알아, 거기에 써니 통장이 있을지.
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 내 통장도 있었고 써니의 통장과 몇 개의 도장. 그리고 알록달록한 편지 봉투, 엽서들. 무척 소중했기에 이 상자에 넣어 놨으리라.
그 상자 안에 있던 생일 축하 카드 중 내 50살 생일날에 딸내미가 내린 저주,
"아빠 사랑해요. 100년만 더 사세요."
챈아, 고맙긴 한데 150살까지 산다는 건 그건 저주란다. 하긴 이걸 깨달으려면 좀 더 자라야겠지. 아무튼 고마웠다, 아빠도 사랑한다.
이리저리 뒤져 보고 있는 내게 써니가 한 마디 거든다.
써니: 추억 팔이 그만하고 통장이나 찾아봐.
나: 통장은 찾았어, 옛 편지들이 재밌어서.
오래 묵힌 추억들은 잘 익은 된장 같고 김장김치 같다. 긴 세월을 묵히면서 당신과 나 사이에 시나브로 스며들었으리라. 늘 함께 했기에 익숙하면서도 늘 고마운 당신. 그 옛날부터 날 사랑해 주었구려. 고마워요.
아침상을 차리는 써니 옆에 서서 편지의 한 구절을 나지막이 되뇌었다.
내게 해가 되어 주는 당신
내게 나무가 되어 주는 당신
내게 구름이 되어 주는 당신
사랑해요
듣고 있던 써니가,
"갑자기 기분 나빠지려 해, 내가 왜 그따위 말 썼을까, 에이 띠바."
음, 원래 된장이나 묵은지가 냄새가 좀 나긴 하지.
화제를 급히 바꿔 본다. "자, 얼른 우리 돈 찾으러 가자."
꼭꼭 숨어 있던 건 긴 시간 묵혀서 불어난 이자일까, 아니면 그만큼의 시간 동안 숙성된 사랑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