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ransfer
** 닥터 트랜스퍼 번외 편입니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및 사건은 허구이며, 소설의 등장
인물 중 이름이 같은 분들께는 미리 허락을 얻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슬비가 다소곳이 내려 도심의 먼지를 잠재웠다.
우산이 없어도 될 만큼 부드럽게 내리던 비는 병원 앞 마당의 벚나무 가지마다 작은 물방울을
하나둘씩 매달아 반짝이고 있다. 응급실 특유의 냄새마저 미풍에 다 날아간 듯, 잠시 동안이지만
응급실과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훈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나는 오전에 내원한 50대 후반의 환자, 최인호의 차트를 조용히 보고 있다.
급성 허혈성 뇌졸중으로 좌측 편마비가 있는 환자이다. 나의 동물적인 직감은 이 환자가 단순한
뇌졸중 환자가 아니라고 귀에 속삭이고 있다.
그는 한때 명망 높은 사찰의 주지였으나, 병마로 인해 파계하고 속세로 돌아온 지 수 년째이다.
현재는 편치 않은 몸으로 휠체어에 의지하며 글을 쓰는 데 남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지만 그 깊은 곳에는 혹독한 삶과 싸우는 듯한 맹수 같은 강인한 생명력의
눈빛을 담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 묘하게 낯익은 눈빛이다.
허혈성 뇌졸중은 뇌혈관이 막혀 산소와 영양 공급이 끊기면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혈류가 차단된 순간부터 뇌세포는 초 단위로 손상되기 시작하며 1분마다 약 190만 개의 뉴런이
사라진다. 증상은 한쪽 팔다리의 마비와 감각이상 그리고 언어장애등으로 나타난다.
발생 후 4시간 이내에 혈전용해제 투여가 가능하다면 손상된 뇌 기능을 상당 부분 회복할 수 있다.
뇌졸중 치료의 핵심은 시간으로 증상이 시작되면 지체 없이 골든타임 안에 병원에 도착하는 것이다.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어제 당직이라 한숨도 못 잤을 텐데"
항상 남을 잘 챙기고 배려심 깊은 수간호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환자 한 분만 더 정리하고 퇴근하려고요"
퇴근하고 돌아온 그날 밤 나는 낯선 꿈을 꾸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기이한 꿈이었다.
고요한 산사(山寺)의 새벽. 나는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이었다.
흰 옷차림의 나는 방금 책을 놓은 듯 손끝에 먹물이 묻어 있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건너편에는 현루(玄淚)라는 이름의 승려가 앉아 있었다.
낯이 익은 눈빛. 틀림없이 현루는 지금의 환자 최인호와 꼭 닮은 고요하고 깊은 눈을 가졌다.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현루는 왼손으로 붓을 잡고 열심히 경전을 필사하고 있었다.
"스님은 어찌 그리 왼손으로만 글을 쓰시오? 오른손은요?" 내가 물었다.
현루는 고요히 웃으며 답했다.
"소승의 오른손은 전생에 칼을 쥐었던 손입니다. 너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여 금생에는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전생의 업보입니다.
왼손으로 쓰는 글은 전생의 죄에 대한 속죄요. 마음을 위한 수행이지요."
그은 전생에 어린 왕을 지키다 누명을 쓰고 팔 하나를 잃은 장수였다고 말했다.
"저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요?
저 또한 전생에 스님을 모함했던 자들과 바를 바 없었을지 모릅니다."
현루는 다시 웃었다.
"선비님, 전생의 인연의 실타래는 복잡하여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전생의 업보에 따라 현생에서는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선비님이 그리 애쓰지 않아도 현생의 악인에게는
현생 아니면 다음 생에 걸맞은 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꿈은 거기서 끝이 났다. 나는 식은땀에 등이 흥건히 젖은채 깨어났다.
'현루'. 파계 전 최인호의 법명은 아니었지만, 꿈 속의 그의 눈빛과 왼손으로 글을 쓰는 모습은
환자 최인호 그 자체였다. 그리고 꿈속의 현루가 말한 "선비님이 그리 애쓰지 않아도.." 는
닥터 트랜스퍼인 나의 능력을 이미 알고 말하는 듯했다.
꿈에서 깨어난 후 그의 병을 옮겨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것 같았다.
그 다음날 평소처럼 한바탕 환자와의 전쟁을 치르고 나서
나는 자고 있는 최인호 환자 손목을 쥐고 사명감처럼 병을 옮겼다. 3일의 타이머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치 시한폭탄의 스위치가 눌리기 전, 고요함 속의 팽팽한 긴장감 같았다.
나는 3일 동안, 심판을 받을 악인을 찾아야 했다. 최인호의 블로그 초기 글을 읽어보다
그의 글에 자주 댓글을 달았던 사람을 통해 자주 언급된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글들로 추측해 보건대 15년 전, 사찰 건축 과정에서 안전 기준을 무시한 부실 공사로,
사찰을 붕괴시켜 큰 피해를 끼쳐 최인호에게 막대한 피해와 스트레스를 안겨준 장본인.
최인호의 뇌졸중 발명의 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나는 '김성수(65세), A 건설 회장'을 검색했다.
그의 화려한 경력과 수많은 사회 공헌 활동 기록이 떴다.
겉으로는 존경받는 기업인이자 건축가였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탐욕과 기만이 담겨 있었다.
부실 공사는 건축가에게 있어 자신의 창조물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임에도 스스럼 없었고
타인의 안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악질적인 행태를 보였다.
나는 결정했다. 입으로는 진실을 속이고 손으로는 비리를 저지른 그에게 가장 치명적인
징벌을 내릴 것이다,
그의 동선을 파악했다.
그는 내일 오후, 자신의 이름을 건 '미래 건축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수많은 건축 관계자와 언론이 모이는 자리. 가장 빛나는 순간에 그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에게 접근할 방법을 모색했다. 중요한 건,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합법적인 루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접근 방법을 준비했다.
D-Day.
도심의 최고급 호텔 컨벤션 홀.
김성수의 '미래 건축 포럼'은 성황리에 진행 중이었다.
주변의 화려한 정장들 속에서 나는 평범한 차림으로 화장실 가까운 곳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연단 위에서 '건축은 인간의 안전과 미학을 동시에 담는 그릇'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웅장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 위선의 모습에 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나는 이 사람을 심판할거다. 그가 파괴한 안전과 진실의 대가를 치르게 할것이다."
연설이 끝나고 질의응답을 위해 김성수가 연단 아래로 내려와 잠시 대기실로 이동하는 길에
화장실에 들어가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문고리를 손으로 쥐는 순간 그의 손과 내손이 겹쳤다.
그는 빠르게 손을 뺏으나 그 짧은 순간이면 충분했다. 병을 전이했다.
여러 가지 접촉 방법을 모색하며 전이를 계획했으나 오늘은 너무 쉽게 전이 기회가 왔다.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뉴스 속보를 검색했으나 그에 대한 얘기는 없다.
전이가 되었다면 지금쯤 그는 우측 반신 마비로 쓰러져 있어야 하는데 세상은 변함없이 평온했다.
오히려 뉴스에 성공적인 행사 소식에 대한 뉴스뿐이다.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뉴스 영상에서도 그는 수행원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고급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언어는 유창했고, 얼굴 근육은 완벽했다. 전이가 실패한 것일까
최인호는 그 날 몇가지 검사를 위해 신경과로 입원을 했다.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3일의 시한은 지났고, 자정은 지났다. 김성수에 대한 뉴스는 아직도 없다.
이것은 전이에 완전히 실패했거나, 혹은 전이가 되었지만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병은 전이되었는데 악인은 멀쩡하다?
최근에 계속 전이의 규칙을 벗어나는 현상으로 인해 나는 혼란스러웠다. 출근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최인호 환자의 병실로 향했다.
혹시 휠체어에서 일어나 오른손으로 글을 적고 있는 그의 모습을 간절하게 상상해 보면서
병실 안. 최인호는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왼손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확실한 전이의 실패. 무슨 일일까?
지금까지 단독질환의 전이 실패는 환자가 악인이라 옮기지 못한 경우밖에 없었는데.
최인호가 김성수보다 더 악인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럼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들어서자, 최인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고요하고 깊은 자비로움이 있었다.
최인호는 그 다음 날 퇴원했다. 신경과 병동에서 연락이 왔다.
퇴원하며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갔다는 연락이다.
나는 봄바람에 벚꽃잎이 떨어진 병원 벤치에 앉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첫 소절을 읽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선비님께."
선비님께? 며칠 전 꿈속에서 나였던 그 선비?
그때의 일이 꿈이 아니란 말인가? 꿈속의 스님 현루가 최인호였다는 건가?
"선비님, 그자는 병에 걸리지 않았을 겁니다.
3일 전 나에게 와서 내 병을 선비님 몸에 옮기려는 걸 알고 있었소.
선비님의 뜻은 너무 고마운 일이나 나는 그에게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뇌졸중을 주지 않았소.
오히려 그에게는 건강과 명예를 그대로 두었소."
내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보다 한 차원 더 높게
병의 전이를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편지는 이어졌다.
나는 오래도록 그를 미워해 왔소.
그가 지은 허물은 돌로 쌓은 벽처럼 내 삶을 무너뜨렸고, 그 잔해는 내 발밑에서 아직도 부서지고 있소.
나는 그를 향해 복수를 꿈꿨고, 그 앙금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왔소.
꿈속에서 현루(玄樓)가 깨달았듯 날이 가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소.
육체의 벌을 내리는 일은 또 다른 증오를 키울 뿐, 진정한 심판은 다음 생에서 받게 될 것이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육신의 상처를 주지 않기로 하였소.
그가 누리던 모든 것 — 명예의 박수, 건축의 제단, 손에 쥔 돈.
그것들은 이제 그를 끊임없이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오.
그가 마주하는 매 축복은 동시에 자신의 죄를 불러일으키는 족쇄가 될 것이니
그보다 무거운 형벌은 없으리라 판단했소.
이번 생에서의 용서는 다음생에서 더 높은 차원의 징벌이 될 수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소.
선비님은 그 징벌의 통로였소.
다음생의 인연의 실타래는 어떻게 얽힐지는 모르나, 심판의 차원은 높아질것이오.
그가 평생 그 죄를 가지고 이 완벽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오.
그것이 뇌졸중보다 더 깊은, 영혼의 마비가 될 것이오.
내가 선택한 것은 복수도, 용서도 아니요. 오래도록 이어질 자각과 속죄이오.
그 불편함이 그에게 길게, 끈질기게 남기를 바랄 뿐이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의 파멸이 아니라,
그가 매일 자신의 행위를 직시하는 삶을 사는 것뿐이오.
그것이야말로 내가 꾸린 작은 심판이며, 또한 마지막으로 그에게 베푸는 연민이오.
감사와 함께,
현루 拜
나는 편지를 읽은 순간, 가슴속 어딘가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직감처럼 최인호는 단순한 뇌졸중 환자가 아니었다. 최인호는 자신의 병을 전이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나보다 한차원 더 높은 전이 능력을 말이다.
이후로도 김성수는 물리적인 마비 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최인호의 용서는 그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족쇄를 채웠다. 그는 이제 그의 삶 자체가 그에게
끊임없이 죄를 상기시키는 고통이 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언론에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불안을 읽어낼 수 있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용서가 오히려 자신을 영원히 구속한다는 이 모순적인 고통.
나는 이제 깨달았다.
최인호의 능력은 단순한 병의 전이가 아니라, 환자의 의지에 따라 심판의 형태를 결정짓는
인연의 도구였던 것이다. 나는 차원 높은 징벌을 목격했다.
다음 환자는 또 어떤 병을 안고 올 것이며, 그 병은 악인에게 어떤 형태의 심판을 내리게 될 것인가?
이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무엇이 옳은 일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나는 챠트에서 최인호의 전화번호를 찾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나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벚꽃 잎 몇 장이 젖은 바닥 위를 흘러가며 , 마치 사라진 인연의 한 조각처럼 흩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병을 옮기기전, 꼭 환자의 눈을 먼저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눈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듣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