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 (제1화: 기억의 비대칭)

by 짧아진 텔로미어

환생 (제1화: 기억의 비대칭)​

​강준우의 기억은 저주 같은 것이었다.

보통의 인간은 죽음의 문턱에서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전생의 기억을 털어내지만

준우의 영혼은 체가 촘촘한 탓인지

단 한 줌의 기억도 털어내지 못한 채 다음 생 살았다.


​고려 시대, 변방의 무사였을 때

그는 사랑하는 여인 ‘서윤’을 전란 중에 잃었다.

그의 품 안에서 을 감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

"다음... 생에... 제가... 당신을 먼저 알아볼게요"


그 말을 맘속에 깊이 채 준우는 일곱 번의 생을 살았다.

조선의 문필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전쟁 직후의 구두 수선공...

신분과 얼굴은 매번 바뀌었지만,

준우는 단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

​그에게 시간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지층이었다.


2026년의 서울,

이번 생에서 그는 삼청동 끝자락에서 북카페 ‘기억의 뜰’을 운영하며

그 지층 아래 묻힌 그녀의 향기를 추적하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섞여 내리던 어느 화요일 오후,

카페의 문이 열릴 때 평소보다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준우는 찻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베이지색 코트 깃을 세운 채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서윤이었다.

​준우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600년 전

불타오르는 성벽 아래서 자신의 품에 안겨 식어가던 그 눈동자.

비록 지금은 짧은 단발머리에

전공 서적을 든 대학생의 모습이었지만,

준우는 그녀의 영혼이 내뿜는 특유의 낌을 놓칠 리 없었다.


"이 춥네요. 따뜻한 차 한 먹어야겠어요"​ 서윤이 카운터로 다가와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맑았고, 말투도 밝았다.

"네, 손님. 오늘의 차는 히비스커스입니다.

붉은색이 전생의 인연을 뜻하기도 하죠."

준우의 말에 서윤은 그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사장님 낭만적이시네요. 전 그런 거 잘 안 믿지만요."


​그녀에게 준우는 그저 ‘분위기 좋은 카페 주인’ 일뿐이었다.

이것이 준우가 겪는 기억의 비대칭이었다.

준우에게 그녀는 온 우주였지만,

그녀에게 준우는 카페주인 이외의 의미는 없었다.


​서윤은 그날 이후 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준우는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좋아하는 온도의 차를 내놓았고,

그녀가 과제를 할 때면

가장 집중이 잘 되는 구석 자리의 조명을 미리 밝혀두었다.

"사장님은 가끔 무서울 정도로 제 취향을 잘 맞추시는 것 같아요.

혹시 저 스토킹 하세요?"

서윤이 장난스럽게 던진 질문에 준우는 찻잔을 닦던 손을 멈췄다.

"스토킹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래된 관찰이라고 해두죠."


​준우는 그녀가 전생에 능소화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기에

카페 마당에 철이 아닌 능소화를 심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고,

비 오는 날이면

그녀가 단조풍의 음악을 즐겼다는 것을 기해 노래를 틀었다.

서윤은 그 세심함에 차츰 마음을 열었지만

그것이 600년의 관찰 끝에 나온 사실일 거라는 건

꿈에도 알지 못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카페에 손님이 끊기고 두 사람만 남았을 때였다.

서윤이 꾸벅꾸벅 졸다가 스케치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준우가 그것을 주워주려 다가갔을 때,

서윤이 잠결에 그의 소매 끝을 붙잡으며 웅얼거렸다.


​"... 윤 도령님, 비가... 너무 많이 와요."

​준우의 몸이 얼어붙었다.

'윤'은 400년 전, 준우가 가졌던 이름이었다.

서윤의 감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망각의 강물도 다 씻어내지 못한 영혼의 찌꺼기가

아주 잠깐 수면 위로 떠오른 것 같았다.

준우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다 멈췄다.

만약 여기서 그녀를 깨워 전생을 말한다면?

그녀는 그 거대한 기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때 ​잠에서 깬 서윤이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준우를 보았다.


"사장님.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사장님을 보니까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파서...”

준우는 쓰라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가끔은 이유 없이 슬픈 날도 있는 법이니까요."


​서윤은 졸업과 함께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지만,

준우에게는 또 한 번의 이별이었다.

​유학 전날, 서윤은 준우에게 작은 스케치북을 건넸다.


"사장님은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게 꼭 저인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었고요. 건강하세요."

​서윤이 카페 문을 나섰다.

준우는 그녀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

그녀는 끝내 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준우는 슬프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의 무게 없이 이 생을 가볍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가 600년을 버텨온 진짜 이유였기 때문이다.


​준우는 카페 테이블을 정리하며 자신의 수첩에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여덟 번째 생의 그녀는 여전히 웃음이 예뻤고, 평온했다.

이번생의 그녀도 날 알아보지 못했다.’

​준우는 다시 찻잔을 닦며 눈물을 떨구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아홉 번째 생의 그녀를 위해,

여전히 비대칭 혼자만의 영원할 사랑을 위해.


그제야 그녀가 준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녀가 카페에서 그를 그린 크로키였다.

그녀가 그린 몇 점의 크로키 넘겨보던 준우는 마지막

넘겼을 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윤도령을 닮 무사의 모습과

그 품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 The end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