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 8화 (마지막 화)

by 짧아진 텔로미어

시(詩) – 8화 (마지막 화)



조선이 해방되기 며칠 전,

일본으로 송환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타케다 슌지는 마음속이 복잡했다.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어질 삶 선택지라고는 오직 죽음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어쩌면 포기의 대가로 이미 고통에 익숙해져 버린 몸과 마음이 이곳의 생활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과 마주쳐야 한다는 두려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케다 슌지, 나와"

그 말이 들렸을 때 그는 본능처럼 벽을 돌아보았.

좁은 공간 속, 고통과 절망이 빽빽하게 쌓여 있던 자리이자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윤서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

손바닥을 대면 아직도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체온과 긁힌 자국들

윤서에게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새길 수밖에 없었던 구절들이 그를 붙잡고 있었.


"타케다 슌지!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

재촉에 그는 몸을 돌려 감옥 밖으로 나왔다.

슌지는 마음속이 더 복잡했다.

풀려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고 더 조용한 감옥으로 옮겨진다는 느낌 때문이었고

몸은 감옥 밖으로 나왔으나 끝내 그녀를 놓지 않았던 그의 영혼의 일부가

여전히 그 벽 안에 남아 자신을 붙잡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을 떠나면 너는 더 이상 윤서를 느낄 곳이 없어'


일본 송환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전쟁의 패잔병 사이에서 오히려 앞으로 견뎌야 할 따가운 시선들이

이미 일본으로 향하는 배속의 공기 중에 섞여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군법을 어긴 장교였고

적국의 인사를 도운 인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내내 배 뒤편에서 배가 가르며 만들어내는 하얀 물결만 바라보았다.


고향인 규슈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그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차창 유리로 비치는 낯선 사람.

자신이 알고 있던 타케다 슌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평온한 풍경이 지나갈수록 조선의 감옥에서 밤과 낮의 경계 없이 들려오던 신음과 발소리,

쇠창살이 긁히던 소리가 오히려 더 또렷해졌고 이곳의 적막은 지나치게 조용해

"네가 설 자리는 여기에 없다. 돌아가."

라고 누군가 말하는 듯했다.


고향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집 앞까지 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부모님의 안부만을 확인한 뒤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가슴 안에서만 맴돌았고,

자신이 저지른 반역의 대가를 두 분이 대신 치른 것처럼 보이는 황폐한 집과 두 분의 표정.

그런 부모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자신을 그는 책망했다.

무엇보다도 군복을 입고 조선으로 떠나던 시절의 늠름했던 모습이 아니라

초췌하고 야위고 고문으로 다친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서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작은 시골 마을에 정착했다.

이름도 슌케이로 바꾸고 살기 시작했다. 과거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간간히 묻는 사람이 있었으나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슌케이, 젊은 사람이 어쩌다 다리를 다쳤나"

"오늘은 도로 정비 일이 있으니 오게"


젊은 나이에 다리를 절며 혼자 지내는 그를 안쓰럽게 여긴 마을 주민들의 배려로

낮에는 마을 근처의 자잘한 일을 했고 밤에는 잠들지 못한 채 밤을 보냈다.

그런 밤이 이어질 때마다 그는 감옥의 벽을 떠올렸고

차가운 돌의 감촉과 손바닥의 상처

날카로운 돌멩이와 그 위에 새겼던 구절들을 다시 떠올렸다.

'윤서는 살아 있을까?'라는 생각,

혹시 이미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깊은 밤마다 그를 잠못들게 했다.


몇 해가 지나 그는 예전 서가 살던 서당을 닮,

낮은 담장과 마당이 있는 집을 마련했고 한 구석에 키 높이 정도 되는 느티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심고 돌아온 날 방 안에 홀로 앉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쉽게 젖고 쉽게 찢어질 종이였지만 상관없었다.


감옥의 벽 앞에서 느꼈던 분위기와

새벽과 낮의 경계가 무너진 시간 속에서 들리던 숨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겹쳐지는 느티나무 아래의 바람을 떠올리며

그는 첫 문장을 써 내려갔다.

하고 싶은 말을 한 번에 다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그건 짧았던 윤서와의 실제 만남과는 달리

마음속에서의 만남만은 오래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매일, 어떤 날은 며칠에 한 번씩 한 구절씩 적어나갔다.


글을 쓴 다음 날 새벽에는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아직 키가 크지 않아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낮은 가지에 종이를 가늘게 접어

끈으로 묶어 바람이 가장 먼저 스칠 것 같은 곳에 묶었다.

그 종이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섰는데 그건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리를 떠나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는 밤마다 글을 썼으며 어떤 날은 한 장을, 어떤 날은 몇 줄만을,

어떤 날은 끝내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종이 앞에 앉아 있기만 했지만 쓰지 못한 날에도

빈 종이마저도 묶어 두었다.


계절이 바뀌며 나무는 자랐고

처음 묶었던 가지들은 어느새 손이 닿지 않는 높이로 올라가 있었다.

그는 처음 느티나무를 심을 때 대부분의 가지가 자신의 키보다 낮은 나무를 었다.

그래야 마음속 말들을 모두 걸어둘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는 손이 닿는 가지 중에서 햇빛이 오래 머무를 곳,

바람이 먼저 닿을 곳을 골라 종이를 묶었으며,

종이가 늘어날수록 느티나무에는 흰 꽃처럼 보이는 종이들이 피어났다.

그 꽃들은 겨울에도 지지 않은 채 바람에 서로 부딪혀 사각거렸으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이 나무가 언젠가는 자신보다 더 많은 말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십 번의 계절이 지날수록

점차 몸이 허약해져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주 글을 쓰지 못했다.

종이를 묶는 날보다 그냥 바라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매달을 종이가 있든 없든 나무를 올려다보는 일만은 빠뜨리지 않았고,

어느 날 유난히 종이들이 푸른 잎 사이에서 더 하얗게 보이던 날

조선에서 처음 느티나무에 걸린 쪽지를 보던 기억이 겹쳐 떠올랐.


처음 묶었던 가지가 이미 한참 위로 솟아 있는 것을 보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더라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 닿지 못해 오히려 오래 남을 수 있었다는 것,

그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바람처럼 가벼워졌다.

다리의 통증이나 숨의 가쁨조차도 마치 이미 오래전에 익숙해진 것처럼 편안했다.


대답을 듣지 못한 부들이

모두 느티나무에 걸려 언젠가는 윤서에게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는 그제야 가쁜 숨을 고르듯 천천히 내쉬었.

눈을 감자 수십 년 전 싱그러운 바람, 비에 젖은 흙냄새, 매화향을 날리던 종이가 떠올랐다.

빨래를 널던 윤서의 흰 손가락. 숨어보던 담장의 푸르스름한 이끼 냄새.

구름에 가려진 달빛,

달빛을 싣고 흐르던 강물소리도 들렸다.

감옥벽을 바라보는 머리가 하얗게 변한 윤서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였다.


"윤서.... 윤서....."

그녀가 뒤돌아 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어둡던 감옥 안이 달빛으로 밝아지고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들렸다.

달빛과 강물. 생전에 둘이 완성시키지 못한 시 구절.


그는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짧은 만남이 내 생애를 바칠 만큼 중요했다고,

그리고 아주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당신의 시인으로 남아 행복했었소"


"안녕, 타케다 슌지. 나의 사랑하는 시인"

윤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느티나무를 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바람이 낮게 울며 종이꽃들을 흔들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