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는 숙소 창가에 서서 서울의 밤을 내려다보았다.
도로 위를 흐르는 불빛은 어느 지점에서도 멈추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었고,
신호등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순서로 색을 바꾸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이 평온함을 얻기까지 치러졌을 수많은 희생들이 떠올랐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남은 것은 남은 대로 두고
모르는 것은 끝내 모른 채로 두며, 떠날 것은 떠나게 두는 것이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세상 이치인 것처럼 마음을 조용히 비워냈다.
다음 날 아침, 윤서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대기석에 앉았을 때, 그제야 몸속 깊은 곳에 쌓여 있던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듯 쏟아져 내렸다.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이륙했고 창밖으로 보이던 한국의 해안선이 천천히 멀어졌다.
버릇처럼 품 안의 쪽지를 만지려다 손을 멈추고,
느티나무 가지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종이들을 떠올렸다.
이제는 따뜻한 품 대신 햇빛과 눈과 비를 맞으며 언젠가 떨어져 나갈 글자들이
슌지에게 닿기를 바랬다. 팔걸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의 생사를 끝내 확인하지 못했지만 자취를 느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정도면 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조용히 다독였다. '그래, 이만하면 된 거야'
늦은 오후, 상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윤서는 오히려 한국말보다 익숙해진
중국어 안내 방송과 낯익은 풍경들 사이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먼저 그녀를 맞았고
불을 켜고 신발을 벗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몸의 내재된 기억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날 저녁 식사는 특별할 것 없었고,
접시를 치우다 문득 슬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떨어졌다.
그것은 울음이라기보다 오래 남아 있던 응어리가 서서히 녹아 흘러내리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접시를 쥔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후의 시간은 눈에 띄는 변화 없이 흘러갔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자리에 앉고, 해가 지면 불을 켰으며, 가끔 바람이 창을 두드리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마치 뛰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더는 무엇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생각마저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했다.
"할머니, 이것 좀 보세요."
그렇게 건조하게 1년이 지나가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손녀 지수가
식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윤서 쪽으로 화면을 내밀었다.
"응, 뭔데."
화면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찍혀 있었다.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의 작은 외곽 마을, 오래된 주택의 마당 한귀퉁이에
서 있는 나무였고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가지마다 하얀 꽃들이 매달려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종이꽃이 피는 나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것은 꽃이 아니라 종이였고, 한 남자가 수십 년에 걸쳐 종이를 묶어 두었으며
어느 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종이가 피는 나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기사를 읽는 동안, 잠들어 있던 것처럼 느껴졌던 심장이
아직 살아 있다는 듯 갑자기 고동치기 시작했고
윤서는 그것이 슌지일 것이라는 생각 했다. 아니, 틀림없이 슌지였다.
느티나무에 매달린 시는 이 세상에서 윤서와 타케다 슌지, 단 두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찾는 그분일까요?"
윤서는 대답하지 않고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윤서는 손녀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이륙했고, 창밖에서는 구름이 층을 이루며 흘러갔다.
기내 안내 방송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가 일본 상공에 들어섰다는 알림이 나올 즈음
다시 눈을 떴고,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뒤에는 신칸센을 타고 가나자와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던 건물들은 점점 낮아지며 사라진 후 얼마 되지 않아
예전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들이 나타났다.
가나자와 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였다.
역사를 나서자 차분한 공기가 몸에 스며들었고, 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이동하는 동안
윤서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스쳐 지나가고 길은 점점 좁아졌으며,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사진에서 보았던 오래된 집이 나타났다.
길 끝에서도 느티나무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고, 하얀 종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윤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나무에 묶인 종이들이 하나둘 선명해졌고,
문은 열려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누구 계신가요?."
대답은 없었다. 마당에는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잡초가 군데군데 무성했고,
나무 아래에는 몇 해를 지난 낙엽들이 쌓여 있고 떨어진 종이 몇 장이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안에… 아무도 없나요?."
나무 아래 그늘에 서자 바람이 불었고, 종이들이 서로 부딪히며 사각거렸다.
느티나무가 잘 보이는 한쪽 벽 아래에는
사람들이 잘 밟지 않는 듯 웃자란 풀들 사이에 불룩하게 올라온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윤서는 그 돌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너져 흩어진 돌들을 하나씩 주워 다시 쌓아 올렸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종이가 묶여있는 가지의 높이가 손 닿지 않을 만큼 높아져 있는 이유와
왜 손을 뻗으면 닿을 가지에는 더 이상 새로운 종이가 묶이지 않았는지를.
바람이 불자 종이들이 한꺼번에 흔들렸고,
윤서는 울음 같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 나무도 알고 있는 것일까, 더는 시를 묶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윤서는 고개를 숙였다.
나무에 손을 대지 않아도, 돌무더기에 손을 얹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충분히 닿아 있었다.
윤서는 울지 않았다.
나무가 지고 있는 세월만큼 버거웠을 슌지의 세월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사람…"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윤서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떠났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온 밤, 불을 끄고 창가에 섰을 때 바람이 창문을 스쳤지만
예전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윤서는 살아갔다.
어떤 날은 느티나무를 떠올렸고, 어떤 날은 떠올리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 이상 슌지를 만날 수는 없지만
그가 지워진 자리는 여전히 시로 남아, 그 시를 읽는 바람이 언제 어디서나 불어올것이라는.
처음 만나기로 했던 느티나무 아래에서 함께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한 구절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겠지만, 느티나무는 지금도 서 있고
나무를 스치는 바람은 지금도 여전히 그가 남긴 시를 읽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마지막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