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구절을 읽던 윤서는,
마당을 가득 메우던 매화 향기가 문득 되살아나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그 향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고, 그 순간 가슴 한복판에서 심장이 예고 없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첫 구절을 보는 순간, 그녀는 시간을 건너뛰었다.
10호실 철문 앞, 녹이 슨 경첩이 삐걱거렸을 그곳. 그 철문옆에 걸린 낡은 액자 속 사진보다
더 오래된 시간 속으로, 바래고 벗겨진 벽면 앞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을 품어 바래진 벽 앞에 서서 새겨진 글을 읽는 것 같았다.
담장... 달빛을.... 강물에.... 띄워보.....
어느 하늘.... 떠다니고 있을....
눈 뜨면 사라....눈 감고....
......
....매화향.....
벽에 새겨진 글자들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중간중간 닳아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윤서에게는 그 불완전함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령 단어 하나만 남아 있었더라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둘만이 알고 있는 문장이었고, 서당의 담장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날이 고스란히 스민 구절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타케다 슌지가 있었다. 그 슌지가...
윤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잠시 눈을 감았다.
벽면을 따라 이어지는 끊어진 문장들은 마치 숨이 가쁜 사람이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남겨 둔 흔적 같았다. 하지만 윤서는 그 조각난 언어들 사이에서도
오히려 완성된 문장보다 더 선명하게 슌지의 마음을 읽었다.
안내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릴 때 윤서는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 10호실은 유일하게 일본인 장교가 수감되었던 곳입니다."
"독립운동가를 탈출시킨 죄목으로 수감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고문 중 사망했다고 하기도, 해방 이후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도 또 일본으로 송환되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공식 문서로는 어느 것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설명을 듣던 중, 윤서의 다리가 순간 힘을 잃고 휘청거렸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윤서 선생님, 부축해 주세요."
경비원 한 명이 다가와 윤서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잠시 어지러워서요."
슌지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일본으로 송환되지 않았다면.... 그 경우 이외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슌지가 살아 있기를.... 제발....'
그러나 곧 윤서는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살아 있기를 바란다기보다, 살아 있는 동안 아프지 않았기를.
그리고 그 생이 너무 짧지 않았기를.
그것이 더 정확한 바람이었다.
설명은 계속 이어졌지만, 이후로 윤서의 귀에는 음소거된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안내자의 입술만이 움직이고 음성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윤서의 시선은 한글로 새겨진 문장 위에 겹쳐져 있는, 반쯤 지워진 일본어 글씨에 머물러 있었다.
おとう… おか…ん…あいたい.(아버… 어머ㄴ… 보고 싶어요.)
......
윤…ㅅ……あいたい.
그리고 그 아래, 힘겹게 이어진 또 하나의 이름. 반쯤 닳아 지워진 자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윤서는 숨이 막혔다. 그는 이토록 협소하고 어두운 공간을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고 있었다.
타케다 슌지. 그 또한 고작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였을 터였다.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을까.
윤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벽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그의 야윈 등을 보는듯했다.
긁혀 떨어지는 돌가루가 보이는듯했고
멈추지 않으려 이를 악무는 그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는듯했다.
일정 마지막 날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기억 속의 지도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들은 분명 익숙한 듯 하지만 달랐다.
서당이 있던 자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돌사이로 이끼가 푸르게 자라 있던 낮은 담장과 오래된 기와지붕 대신, 네모 반듯한 현대식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끈한 외벽은 햇빛을 차갑게 반사했고,
유리창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시적으로 겹쳐졌다가 곧 사라졌다.
윤서는 그 건물을 올려다보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쯤이었을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건물 벽으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돌과 유리 사이에서 올라오는 감촉은 냉정할 만큼 서늘했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팔목을 지나자, 이상하게도 손을 타고 오르던
온기가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그날도 이렇게 서 있었지. 같은 자리, 같은 높이에서.
슌지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말보다 먼저 전해지던 체온. 손끝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팔로 천천히 번져 오르던 미세한 떨림.
그 온기는 단순한 체온이 아니라, 끝내 말하지 못한 약속의 형태였다.
윤서는 그 온기를 수십 년 동안 가슴 한복판에 묻어 두고 살아왔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릎은 아픔을 기억하는 관절인지도 모른다. 무릎 탓에 걸음은 느렸지만,
마을 뒤편으로 이어지는 산길 앞에 섰을 때 그녀의 시선은 조금 더 앞서 가고 있었다.
발걸음보다 기억이 먼저 길을 알아보았다.
도로가 완만하게 굽어지는 지점, 걸을 때마다 발목을 건드리던 작은 풀들,
비가 오면 질퍽해지던 흙의 냄새까지도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다.
윤서는 숨을 고르며 한 걸음,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기억에 몸이 이끌려 가는 듯했다.
그리고 구비를 돌아서는 순간, 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주변의 풍경이 변하는 동안에도, 느티나무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윤서는 한동안 멈춰 서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예전과 같은 거리, 같은 각도였다. 그때도 이렇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느티나무를 보던 슌지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훔치듯 바라보던 자신의 눈길.
나무는 훌쩍 자라 있었다.
그들이 쪽지를 묶어 두던 가지는 이미 손이 닿지 않는 높이로 올라가 있었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줄기에는 수십 겹의 시간이 겹쳐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낮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쪽지에 묶인 시를 읽는 듯, 느리고 깊었다.
윤서는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오랫동안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 온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체온에 익숙해진 종이의 가장자리는 닳아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다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이라는 강물에
나를 고이 띄워 보낸 날...
.......
윤서는 종이를 접지 않았다.
그대로의 형태로, 바람이 읽을 수 있도록 쥐고 있었다.
오랫동안 품에 안고 다녀 따뜻해진 쪽지는 이제 그녀의 손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빛에 바랜 글자들 사이로, 시간이 스며든 흔적들이 보였다.
그녀는 나무 가까이 다가가, 손이 닿는 가장 낮은 가지를 찾았다.
조심스럽게, 마치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종이를 가지에 묶었다.
끈을 조이지도, 느슨하게 두지도 않았다.
바람이 흔들 수 있을 만큼만, 그러나 쉽게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이제 이 시를 읽을 슌지는 없다.
그러나 윤서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읽지 않아도, 그의 쓸쓸했던 눈빛, 그 눈빛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자신의 시선,
말 대신 건네졌던 침묵과 선택들이 이미 이 나무 안으로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느티나무를 부둥켜 앉았을 때
그제야 한꺼번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갈 때 느티나무 잎이 세차게 흔들려 울음소리를 삼켰다.
"보고.... 보고 싶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당신.... 얼굴을 보고 싶.... 어요..."
윤서가 흐느끼며 외칠 때
느티나무는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시간을 나이테 속에
고스란히 받아 적고 있을 뿐이었다.
겹겹이 쌓인 나이테 사이로,
두 사람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시를 조용히 새기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