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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그린 Jun 10. 2024

지우개 사건! 사소했지만 나는 상처가 컸다.

난 여전히 마음이 물러터졌고 정에 목말라 있구나


중학생 아들에게 유난히 좋아하는 지우개가 생겼다.


집 앞 문구점이나 다이소, 서점에 팔면 좋은데 아는 사람만 찾는 물건인지 잘 갖다 놓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집에서 좀 떨어진 외진 골목에 의외의 문구점이 있었고 들어가 보니 그것을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은 종종 멀리 떨어진 그 문구점에 가서 지우개를 왔다.


그러다 시험기간에 접어들어 아들은 바빠졌고 문구점이 갈 시간이 없으니 사다 줬으면 하고 나에게 부탁을 했다.

점점 말수가 줄어드는 중학생 아들에게 부탁을 받으면 이젠 뭔가 미션이 생긴 듯 기분이 좋을 지경이다.


부탁받은 날 기분 좋게 그 문구점을 방문했다.

안에까지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지우개가 어디에 있는지 한참만에 찾아냈다.


이왕 간 김에 좀 넉넉하게 구매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두 개가 전부였다.

지우개 청소기도 필요해서 찾아보는데 영 보이지가 않았다.


계산대로 가서 물었다.

"혹시 이 지우개 더 없나요?"


계산해 주시는 분은 대략 50대로 보이는 여자분이었는데 손님 대응하는 것이 뭔가 서툴게 느껴졌다.


"거기 없으면 없는 거예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아 그럼 언제쯤 더 들어올까요?" 다시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몇 개나 필요하신가요?"라고 묻길래


"한 박스 사고 싶은데 얼마예요? 한 박스에 몇 개나 들었나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 만원만 주세요. 수량은 30개 정도 들어있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지우개 2개는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뜻밖의 호의를 받으니 너무 고마워서 연신 감사인사를 전했고, 물건을 좀 더 팔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지우개 청소기도 사고 싶은데 없느냐고 또다시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우개 청소기가 뭐냐며 되물었다.

왜 모르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며 우습게도 물건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했다.


지금은 없는 것 같고 지우개 주문할 때 지우개 청소기도 가져다 놓겠다고 해서 또 감사인사를 하며 친절함과 따뜻함을 안고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아들에게 그 문구점 여자 사장님이 아주 친절하시더라라는 얘기와 함께 한 박스를 주문했더니 두 개는 서비스로 주셨고, 지우개 청소기도 갖다 놓는다고 하셨다.라고 기분 좋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주문한 지우개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주중에 갈 시간이 안 돼서 못 가다가 일요일이 되었고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영업은 하는 것 같았으나 혹시나 싶어 문자 왔던 번호로 확인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우개 한 박스 주문한 사람인데요.

혹시 일요일인데도 오픈하셨을까요?"

그때 그녀가 받았고 분명 다정했던 그 사람이  맞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때 만원 주고 가셨지요?

지우개 한 박스에 24개 들어있고, 그때 2개 가져가셨으니 차액으로 3천 원을 더 지불하면 되겠네요"라고...


난 순간 멍해져서 대응할 말을 잃어버렸다.


"제가 한 박스 사겠다고 한 박스 가격을 지불했잖아요? 그리고 그때 남아있는 2개는 그냥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계속 감사하다고 인사도 했고요? 기억 안 나세요?" 정신을 차리고 그때의 상황을 짧게 얘기해 봤다.


그랬더니 뭘 잘못 알아들은 거 아니냐며 오해가 있나 보다며 자기가 왜 그냥 주냐며, 한 박스에 24개니까 돈을 더 내면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그녀였다.


처음 얘기한 수량이랑 물건 금액이 달라진 건에 대해서 상황 얘기를 그냥 했다면 가게의 손실이 가면 안 되는 거니까 당연히 순순히 받아들였을 거다.

하지만 내가 황당하고 화가 나게 만드는 대목은 금전적인데 있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인간적인 정다움과 따뜻함에 감동하여 감사인사를 여러 번 했고 그 좋은 마음을 아이에게까지 전달했었다.

그리고 좀 전의 통화도 그때를 생각하며 단순히 오픈여부에 대한 문의 건으로 전화한 것이었는데 이건 뭐 그날의 정겨운 상황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귀 못 알아먹은 손님으로 치부하며 그날 그런 서비스 같은 것은 없었다며 모르쇠로 나오는 그녀의 황당한 대응에 난 오랜만에 목소리가 떨리도록 화가 치밀었다.


여러 번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려고 재차 얘기를 해도 같은 말만 반복이었다.


'그까짓 돈 큰 금액도 아니고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지만 어떻게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나 다르게 말하며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냐'며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큰소리로 화를 냈다.

그랬더니 "그럼 그 지우개 2개는 그냥 서비스로 드릴게요"란다. 하하.

이게 뭐라고. 내 심장이 이렇게나 빨리 뛰어야 하는 건지. 맙소사... 


나는 목소리가 큰 편도 아니고 어이없는 상황을 맞아도 상대에게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며 화를 내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으니 이런 나도 이성을 잃고 말았다.

거의 10년 만에 화를 낸 것 같다.


문구점에 방문했더니 중년 남자분이 앉아 있었다.


지우개 주문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지우개 한 박스 24개 중에 4개를 빼내고 있었다.

나는 만원만 지불했기 때문이다.


전에 있던 그 여자분은 누구인지 물으니 그냥 직원이라고 했다.

그 직원과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묻는데 보아하니 나와 통화한 내용을 이미 전해 들은 듯했다.

서비스라는 이름의 지우개 2개 값을 달라는 말이 없으니 그 직원과 통화를 마친 건 확실했다.


난 속으로 직원이면 어차피 힘도 없는 사람인데 괜히 불필요한 말씨름만 했네 싶어서 더 말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그 남자 사장님이 기분 나쁜 상태로 그냥 가면 어쩌냐며 상황을 얘기해서 기분을 풀고 가면 좋지 않겠냐며 물건을 안 주고 계속 물고 늘어졌다.


결국 그날의 상황을 다 전달했고 좀 전에 통화 내용까지 얘기해 주었다.

그런데 이 남자 사장님은 지금 물건 값에 대한 거 받으면 된 거 아니냐며 여기는 가게고 물건만 똑바로 주면 된 건데 사적인 감정이 뭐가 중요하냐며 도대체 어느 부분이 기분 나쁜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나는 물건과 가격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다.라고 했고, 그는 여기는 문구점인데 사적인 감정이 뭐가 문제가 될 일이냐며 평행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대화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다 됐으니 물건이나 주라고 하며 겨우 받고 풀리지 않은 기분으로 그곳에서 나왔다.


아! 그리고 지우개 청소기 주문하는 것은 깜빡했다는 그녀였다.하하


여기까지가 정말 하찮은 사건인데도 심장이 벌렁 이게 감정을 건드려 화가 났던 어제의 이야기다.


그동안 평정심을 유지하고 나와 다른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꽤나 애쓰며 살았다.


그런데 분명 있었던 일을 발칵 뒤집으며 좋은 감정까지 없던 일처럼 뒤엎어버리는 상황을 아주 못 견딘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살면서 여러 곳곳에서 상처받고 충격받는 일들이 늘 생기지만 따뜻했던 감정에 대한 배신의 상황이 나의 트리거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사람의 감정은 의미를 안 두는 사람도 꽤나 있겠구나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저 감정이나 예의는 접어두고 무인 편의점이나 무인 문구점처럼 상황의 정확함만 있으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삭막하고 씁쓸한 마음이 든다.


난 여전히 마음이 물러터졌고 정에 목말라 있는 것 같다. 바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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