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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Sep 21. 2020

남용된 젊음과 잃어버린 순수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 후기

어제 잠들기 전에 <태양은 가득히> 영화를 봤다. 갑자기 영화 주인공 마리 라포레(Marie Laforet)의 노래에 꽂히기도 했고, 문득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대체로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와 나는 영화를 고르는 안목이 비슷하다. 가족 중에 그래도 한 사람이나마 나란히 소파에 앉아 같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내 주변에는 가족마다 취향이 제각각이라 영화를 다 같이 못 본 지 10년은 된 것 같다는 친구도 있으니).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중에 정말 잘 생긴 분을 봤는데, 아버지는 항상 그분을 언급할 때 '알랑드롱 알랑드롱'하셨다. 그때마다 무슨 사탕 이름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잊었다. 그러다 2년 전쯤 <태양은 가득히>를 보고 나서 그 의미를 실감했다. 20대의 알랭 드롱(Alain Delon)과 마리 라포레는 정말 아름답다.


(좌) "톰" 역을 맡은 알랭 들롱, (우) "마르쥬"역을 맡은 마리 라포레


 배우들의 미모에만 감탄하고 끝났다면 굳이 여기에 후기를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첫 번째 볼 때는 몰랐는데, <태양은 가득히>에서는 많은 소재들이 각 장면마다 특정한 암시를 던진다. 그런데 그 효과가 60년이 지나서 보는 내 눈에 이렇게 참신하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 감독의 더 오래된 영화인 <금지된 장난>도 본 적 있지만, 이 영화에서와 같은 시각적 암시는 기억나지 않는다. 감독의 원숙함이 <태양은 가득히>에 와서야 꽃을 피운 것인지도 모른다. 인상적인 두 가지 소재와 그 암시를 조금 적어보려 한다.


1. 과일, 생닭, 생선


영화 속에서 두드러지는 소재는 단연 과일이다(또는 채소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흔히 우리도 그러하듯 과일은 별다른 조리과정 없이 날것으로 섭취한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종종 과일과 함께 등장하며 그것들을 날것으로 먹는다. 요트 뒤에서 질투에 찬 톰이 필립을 단도로 찌르고 난 직후에도 그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다. 과일은 청년의 순수함이나 풋풋함과 조응하여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젊음을 부각한다. 그리고 항구에 정박한 후 톰의 눈에 비치는 시장 매대의 과일들, 리어카 장사꾼이 쳐들고서 톰과 마르쥬에게 권하는 큼직한 청포도, 젊은 주인공들과 함께 등장하는 과일들은 인간이 청년기에 가지는 때 묻지 않은 순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영화 후반부에 톰이 호텔 방을 찾아온 또 다른 친구 프레디마저 죽인 후 부엌 구석에서 '조리된 닭'을 먹는 일은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심부름 여자를 대신하여 프레디가 과일과 함께 갖고 온 것은 생닭이다. 즉 앞에서의 과일과 같이 날것 그대로의 순수이지만, 이미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고 훼손된 순수를 암시한다. 톰은 프레디를 죽였다는 행위로 한층 더 순수성을 잃게 된다. 사건을 덮기 위해 새로운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하고 거짓말은 더욱 늘어간다. 그의 순수함도 훼손되어 가는 것이다. 조리된 닭을 뜯어먹는 톰은 이미 필립을 죽일 때의 모습보다 더 많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순수함을 잃는 운명에 대한 암시는 시장에서도 카메라의 시점숏을 통해, 즉 톰의 시선을 통해 나타난다. 시장에서 생선을 살피던 톰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생선 토막이 들어온다. 물리적인 외부의 힘-생선장수의 손목 스냅-에 의해 끊어진 생선 대가리는 일차적으로 그에게 친구의 목숨을 끊은 일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후 조리된 닭을 뜯어먹는 톰을 고려해보면 보다 근원적인 암시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선은 곧 주체의 밑바탕에 깔린 의식을 대변하는 바, 그가 생선 대가리를 바라볼 때는 벌써 젊음이 가진 순수를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리어카 장사꾼의 포도송이를 그가 거부하는 데서, 과일과 순수의 상관관계를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2. 난폭한 젊음, 바다


톰, 필립, 필립의 애인 마르쥬가 탄 요트를 희롱하듯 흔드는 파도의 모습, 이에 맞서 키를 이리저리 돌리는 주인공들의 모습, 바다는 젊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일찍이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물과 꿈>에서 물의 성격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부드러운 물, 다른 하나는 난폭한 물이다. 부드러운 물은 잔잔하여 나르시스의 얼굴을 비출 만큼 반사적이고 순응적이며, 융화하려는 성질을 지닌다. 반면 난폭한 물은 인간 의지에 반하는 대립자로서, 또는 도전자로서의 콤플렉스를 지닌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다뤄지는 바다는 난폭한 물의 성질을 보여준다. 바다는 끊임없는 파도로 요트 '마르쥬'호에 부딪히며, 톰이 탄 구명보트를 요트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그리고 필립은 톰의 호소를 무시하고 보트와 연결된 줄을 장난 삼아 키에 묶어놓은 채 마르쥬와 밀애를 즐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바다가 난폭한 물로 현현하는 까닭은, 선상에서의 톰과 필립의 갈등, 필립의 타살에 의한 일방적인 갈등의 종식에 있다. 살인사건을 모르는 마르쥬가 필립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톰을 의심하듯, 부유한 필립과 (상대적으로) 가난한 톰은 경제력에 따른 멸시자격지심으로 서로 융화될 수 없다. 톰은 마르쥬를 남몰래 연모하면서 필립의 재산을 탐하고, 필립 역시 톰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려는 경계를 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난폭한 물이자 대립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이든 승부가 나야만 난폭한 바다는 잠잠해질 것이다.



나아가 톰은 필립의 소유를 침노하려는 도전자가 된다. 선상에서 일어난 살인에는, 그리고 톰이 필립의 이름과 소유를 훔치는 행위의 뿌리에는 페르시아 왕 크세륵세스의 채찍질이 숨어 있다. 크세륵세스는 발칸 해협에서 난폭한 풍랑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야심이 담긴 가교와 인부들을 모두 잃는다. 그는 굴하지 않고 바다를 대적하여 쇠로 된 채찍과 불에 달군 낙인으로 헛되이 바다에 도전장을 내민다. 융화되지 못하고 승리를 거둬야 하는 젊음의 법칙은 결과를 재지 않는다. 영화가 인물의 심리묘사보다도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젊음이, 톰의 야심이 투영된 바다는 필립의 죽음 뒤 톰의 내면 같은 한 차례 풍랑을 일으킨다. 그 후에야 비로소 키를 잡은 톰에게 유유히 길을 터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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