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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Oct 09. 2020

[독서노트] 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소설집, 세계사)


이상문학상 제 1회 수상자인 김승옥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상상이다, 상상은 고통을 만든다, 고통을 함께하는 사람끼리는 행복하다. 


어느 누구나 상상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간다. 그 상상은 당장에 끼니가 생겨 배가 불렀으면, 하는 것부터 내 집 마련, 취업, 안정된 생활, 사랑의 쟁취 등 여러 모습을 띤다. 이렇게 나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개 상상이란 미래 지향적이며 현재 내 손에 없지만 언젠가 훗날 이룰 것, 혹은 이루고 싶은 것들이 한데 모인 집합이다. 우리가 품은 상상을 향해 조금씩 내딛는 발걸음은 현실이 자아내는 여러 모순과 삶의 다른 조건들로 말미암아 좌초되곤 한다. 그러다가도 우리는 상처 받은 마음을 부여잡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난다. 또는 이미 좌절을 겪어본 친구들을 만나 기탄없이 얘기하다보면 어느새 다시 '상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모두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그러나 어떤 상상은 섣불리 공유될 수 없다. '화살같이 날아가는 시간(光陰似箭)'이라는 말과 같이 정신 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 망각됐던 예전의 꿈이 문득 고개를 들어 나의 이름을 외쳐 부른다면, 그래서 그 호명에 응답하는 순간 현실 속 안정적인 여러 조건들(심지어 문제삼지 않았던 조건들)과 현재 내 위치를 내려놓아야 한다면 어떨까.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잊힌 상상들은 과연 누구와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위의 관심과도 거의 떨어져 있는, 과거를 향한 상상을 들어줄 사람은 누구인가.


윤대녕의 《남쪽 계단을 보라》에 실린 소설들은 이 질문들에 대한 어느 페르소나의 일기이다.


1. 회귀적 상상력의 고통


90년대 이전의 문학 또는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흐름이 '세계에 대한 이성적 판단과 합법칙성, 변증법적 해석에 대한 신뢰'였다고 한 연구자는 말한다. 이 말은 90년대 이후 나타난 안티-테제를 감성적 판단, 탈법칙성, 해체주의로 규정하도록 하는 언질을 준다.(이재복, 2006)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는 4.19 혁명 이후, 3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데올로기는 군부 독재와 그에 반대하는 저항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억압 기제인 동시에 해방구로 작용했다. 계몽이라는 얼굴을 한 폭력주의가 정부와 기층민 모두에게 서로를 향한 정당한 목소리라고 맹신되면서, 개인이 가진 목소리존재론적 탐구는 사이먼&가펑클의 노래와 같이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가 됐다.


《남쪽 계단을 보라》에 실린 단편소설 속 여러 명의 '나'도 개인 차원에서 잊고 있었던 과거의 경험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존재론적 탐구에 천착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스럽다. 과거에 남은 경험들은 타인들과 자신이 은연중에 함께 구성한 것이지만, 타인들은 이미 '얼마 후면 한결같이 나를 외면하고 멀어져'간다.(<지나가는 자의 초상>, p.95) 이데올로기와 폭력의 시대에 암류로 흐르고 있던 자기만의 경험과 자기만의 목소리를 다시 건져 올리기엔, '사람과 사람 사이엔 반드시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자신을 외롭게 하고(<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p.206), 너무도 많이 변해버려 '완강하게 뒤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 추억 속 친구가 현재를 사는 내게 좌절감을 안겨 준다.(<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p.272)


<남쪽 계단을 보라>에서 워커홀릭으로 살던 주인공은 우연히 지하철 계단에서 5분 간격을 두고 같은 여자를 마주친다. 그 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5분 뒤쳐진 것 같은 강박을 겪는다


과거를 향해, 속은 자신의 존재적 근원을 향해 촉수를 뻗은 상상력은 그 '공유 불가능성'이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라캉(J. Lacan)을 빌어 말해보자. 사람들 각자의 상상계(The Imaginary Order)에 보존된 미래와 욕망의 형상들은, 술병이며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언어로 교환된다. 그리고 자연스레 상징계(The Symbolic Order)에 공통적으로 포섭된다. 이와 다르게 과거와 자신을 향해 회귀하는 욕망은 사실 본인 또한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 지, 심지어 그 욕망이 가진 형상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어 상징계에서는 해석될 수 없다. 이 해석 불가능성은 곧바로 현실계(The Real Order)로부터의 환멸을 끄집어낸다.


그래, 실은 너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새벽녘에 불현듯 노크소리 같은 걸 듣고 홀로 깨어나게 되면 나도 그 소리에 화답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있었다. 어떻게든 한번쯤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모두가 진흙밭에서 벌거벗은 채 다투고 있는 중이 아닌가. 무엇 때문인지. 무얼 위해서인지도 모른 채.

<남쪽 계단을 보라> p.87



현실과 간격을 두고 서 있는 저 세계를 홀로 바라보는 자는 스스로를 더이상 현실 안의 '나'로 보지 못하고 현실-상상 사이의 '나'로 정립한다. 이데올로기가 보장하는 듯 했던 목적성에서도, 현실에서 유지되는 안온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이제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은 발붙일 곳이 없다.


2. 심연(深淵)은 심연인 채로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사막이 발생한다는 사실, 어찌 보면 결과적으로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두 중학생은 '운명적으로' 친구가 된다.(<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p.254)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다 환자와 문병인으로 병동에서 재회하기까지 이들 마음 속에는 사막이 들어서게 된다. 사막은 이제껏 가보지 못한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과거를 잊어가며 어릴 적 상상했던 사막은 형체가 없어진다. 단지 황량함, 공허함만을 남긴 일체의 정서(sentiment)가 된다.


사막의 반대편에 있다는 바다는 이러한 사막을 자신과의 화해와 수용이 낳은 눈물로 가득 덮는다. 또한 바다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연장선 위에서 새로운 인연의 잉태라는, 한 존재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에 다름 아닐 것이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에서 '나'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친구의 파리한 몰골을 보고도 옛날 친구와 함께 나눴던 꿈, 즉 직접 사막에 가보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 까닭은 오히려 황량함공허함 뿐인 사막의 형체를 봄으로써 친구와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직시하려는 데에 있다. '사막에 들어가 사막과 같아지는 자에게 문득 바다가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정혜경, <사막과 바다의 접경을 보았던가>, 2003)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중에는 이미 사막으로부터 벗어나 바닷가에 당도한 인물도 있고, 사막 한가운데를 아직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인물도 있다. 전자에는 <배암에 물린 자국>과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의 주인공이, 후자에는 <지나가는 자의 초상>과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의 주인공이 있다. 이들은 모두 타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여전히 관계 맺기를 열망하는 양가적 감정(ambivalence)이 있다. 과거에 대한 상처와 과거의 극복을 위한 상상은 섣불리 타인에게 내비출 수 없다. 그 상상은 개인만이 온전히 향유하는 심연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입을 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대편이 사실 누구인 지 모르는 채 섹스를 나누기도 한다.(<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p.290) 이처럼 심연이 아닌 타인 자체에게 다가가려는 갈망 또한 소설 속에 선연하다.


심연을 무시하거나 심연을 알아내려 서툴게 다가간 인물들은 결국 바다에 가 닿지 못한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에서 '이영주'는 '나'와 함께 정사를 나누고 사막을 향해 가려다 돌연 동행을 단념한다. 그녀에게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고 '나'의 품엔 그녀가 선사한 백합 구근만이 있다. <지나가는 자의 초상>에서 '나'의 구애에도 마음을 열지 않던 '김은애'는 결국 '나'의 아이를 낙태하고 기별도 없이 '나'의 곁을 떠난다. 서로 공유되지 못할 상상-심연에 대해 <배암에 물린 자국>의 밀짚모자 농부는 나지막이 한 마디를 던진다. 그는 '나'의 심연을 굳이 들여다보려 애쓰지 않는다.


안에서 키우고 있던 뱀였겠지요. 그게 제 몸을 물었던 거에요. 정말 한갓 뱀였다면 그러고 다니지는 않았겠죠...

<배암에 물린 자국> p.27


고통은 함께 나눠질 때 행복하다. 다만 때로는 공유되지 못할 타인의 심연을 인정해주고, 나 자신의 심연도 그대로 내 것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관계 맺기는 상상의 고통을 얼마간 덜어줄 뿐이다. 그러나 고통을 인정하며 문득 들어선 바다에서라면, '타인'과 '나'라는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각자의 심연은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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