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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Nov 01. 2024

[독서노트] 《사람의 아들》과 거대담론의 변화

(이문열 장편소설, 제4판, 민음사)

작품 줄거리를 포함하지 않았으므로 스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문학작품은 스스로 감상 때 더 큰 의미가 되기에 일독을 권합니다.



누군가 《사람의 아들》을 읽고 남긴 감상문을 읽고 나서부터 '거대담론'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감상문 끄트머리엔 이런 내용이 쓰여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 말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신과 인간'이라는 거대담론을 치열하게 다룬, 또는 그러한 시대에 나올 수 있었던 작품.


지금 시대에 거대담론은 문학 판에서 확실히, 이문열이 신인으로 활약하던 7,80년대만큼 논의되지 않는 듯 보인다. 문학 판에서는 황석영《한씨 연대기》에서 드러난 분단 상황 아래 외세 대 민족의 치열한 갈등이나, 조정래《태백산맥》 인물들에게 생존방식 그 자체였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세계화시대를 버티는 지금 사람들에게 예전 같은 울림을 주지 못한다. 몇몇 독자들만이 적어도 그런 담론을 통해 범국가적으로 연대할 수 있었던 시대를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안 되는 매체 속에 문학의 권위가 여전할 때의 이야기이다.


출처: korea.stripes.com(좌), pixabay.com(우)


기독교에 초점을 맞추자면, 《사람의 아들》이 쓰인 시대의 한국사회는 전후(戰後) 혼란기였다. 주류 기독교는 이를 계기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배타적 낙관주의와 유대 민족의 선민사상을 벤치마킹한 성장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만큼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문제는 당시 독자들에게 이질감이 적으면서도, 추상적이지만 현실적인 고민에 맞닿아 있었다. 이런 배 속에서, 혹자는 현세에서의 구원을 포기한 야훼의 이기심을, 산업화를 이끌었지만 정작 산업화의 혜택으로부터 민중을 배제시킨 국가의 은유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또한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아하스 페르스'의 이야기가 언급하는 서아시아의 방대한 고대종교 지식은 읽기의 껄끄러움을 감내하고서도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해소시켜 주었을 것이다(필자의 중학교 시절 기독교를 혐오하던 담임선생님의 근거가 다 이 작품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거대담론이라는 것은 현재 문학에서 자취를 감췄을까? 그렇게 보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작가 이문열, 출처: 울산신문

먼저,  사회가 다원화됐다. 지금은 사람들이 각자의 행동 동기와 가치관을 취향, 개성, , 유행 등에서 찾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개인 위에 존재했던 민족, 이데올로기, 종교, 전통 등이 사라진 것은 아닌,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가치관이라는 팔레트에 놓인 시대랄까.《사람의 아들》이 처음 쓰인 당시만 해도 나라 안팎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세력의 충돌이, 국내에서는 권위주의 정권과 학생운동 등 (상대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 대항세력 간의 폭력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가 견고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집단으로부터 독립된 생각을 낸다 해도 결국 집단의 주장에 부합하는지 어긋나는지가 첫 번째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한 집단의 주장에 부합한다면 곧 다른 집단의 주장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한쪽이 이기거나 변증법적으로 한 층 발전된 결과를 낳으면서 끝난다. 이원론은 아하스 페르스가 고민했던 신의 모습에도 있다. 아하스 페르스(혹은 민요섭)는 크리스트교의 모순이 '자비로운 농경민족의 야훼'와 '혹독한 유목민족의 야훼'의 기형적인 착종에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 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 모순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도덕률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지 인간을 초월한 단계로부터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의 은유이다. 아하스 페르스(혹은 민요섭)가 인간적인 신(도덕)을 직접 찾아 나서는 데에서, 그리고 민요섭의 대담함과 기발함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서사 자체는 인간과 신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이런 도식이 자못 낯설다.


2009년 KBS에서 방영했던 TV문학관《사람의 아들》 스틸컷


둘째로, 공론장으로서의 문학의 권위가 달라졌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사람의 아들》을 집어들었을 때, 겉면에는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이라는 소개 문구가 쓰여있었다. 문학 공부하는 사람에겐 상의 이름이며 수상기관인 민음사라는 출판사가 상징하는 권위이며, 이런 게 너무도 익숙하다. 한들, 문학 취미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애호가들 사이의 인정에 불과하다. 사실 본인도 소위 'MZ'세대에 포함되는 연령대로서 윗세대들이 '담배연기 자욱한 대폿집에서 이문열과 김지하를 논했다'는 젠체하는 듯한 회고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문학을 향유한 방식이, 최근 한강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식에 뒤따라《채식주의자》《작별하지 않는다》등을 읽고 인증샷을 찍어 포스팅하는 지금의 현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문학은 더 이상, 이제 여러 사회적 현안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숨겨진 진실을 끈질기게 탐구하거나, 대중 속에서 (그러나) 일반 대중과 차별화된 혜안을 품어야 한다고 위로부터 우리에게 소리치지 않는다. 그 대신 일상의 피로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서 작고 소중한 것을 찾아 위안을 삼으라고, 또는 자신 안에서 슬프고 지친 또 다른 복수(復數)의 나 자신을 찾아 그들과 연대하라고 격려한다. 




그러나——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거대담론은 존재한다. 《사람의 아들》의 주제와 같은 거대담론이 더 이상 논의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소설에서의 절대신(God)에만 국한된 얘기일 것이다. 이문열이 서론에서 밝혔듯 "신은 우리들의 영원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신'이라는 단어를 '자본주의'라는 말로 대체해도 어색하지 않다. 가지지 못해 억압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쩐(錢) 신에게 전 생애를 헌신할 만하지 않은가? '팔로워 수'라는 말로 대체해 보면 어떨까? 가상 세계에서 몇십 만, 몇백 만 개의 눈이 나를 주목하고 인정한다면 그들의 욕망으로 내 본모습을 덮어씌울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중 적잖은 수가 이러한 신들로부터 고통받고 있으며, 더러는 격렬하게 저항한다. 이러한 몸짓들을, 우리는 서로를 잇는 수많은 해시태그와 1인 미디어의 시대에 매일같이 공유되는 일상들 속에서 마주친다. 문학도 자신에게 씐 이전의 권위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러한 매체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게 발견하는 위안과 격려 사이에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임을 보기도 하고, 함께 '우리'가 되어 무엇인가를 이뤄낼 가능성을 보기도 한다. 

오늘날의 거대담론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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