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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너울 Apr 17. 2024

체 게바라의 갈림길에 선다.

2018년 여름, 볼리비아.



무리한 스케줄 탓인지 퇴직 후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래 기다려온 여행이었기에 망설일 시간마저도 쪼개어 출발을 준비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두 번째 환승을 앞두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건강에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 이륙이다, 나는 호텔 도착까지 잘 해낼 것이다. 그렇게 믿었고 실제로 체크인까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인천공항을 벗어난 지 5일째 되던 날, 몸에서 비상사태임을 알렸다. 세수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면 덩달아 다리에 힘이 풀렸고, 열이 끓어서 몸은 뜨거운데 이상하게도 오한이 같이 들어 차가운 수건을 몸에 댈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두려움에 밀어넣은 것은 이대로 여행을 마치지 못하고 서울에 돌아가는 일이었다. 이 땅을 밟으며 끝없이 표류하고, 내 생각의 마지막 계단을 찾아 그것을 우뚝 밟고 서겠다는 꿈과 함께 얼마나 오랜 계절을 살았는가. 이 간절한 마음에도 고작 건강 때문에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제대로 설 수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깨끗이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도 못해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눈물을 쏟다가 불현듯 하나의 의문이 스쳤다. 왜 굳이 이곳이어야 했을까. 누구 하나 나라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 하는 이 땅에 왜.

 



나는 왜 못 뜰까? 하는 고민으로 밤을 지새던 날들이 있다. 이 회사와 도시, 국가 그리고 아직은 작게만 느껴지는 내 이름. 나는 어디로 갈까, 올해야말로 뜰 수 있을까. 지난날 말장난이랍시고 "물에는 뜰 수 있잖아." 친구들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게라면 나는 충분히 뜰 수 있다. 올해는 기필코 뜨고야 말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에 홀린 듯 새벽 수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명을 응시하며 나른하게 물을 차고, 갑자기 쏟아지는 물방울을 온몸으로 맞기도 했다. 언제 어디로 뜰까 하는 고민에 소란스러웠던 마음은 그 깊고 넓은 웅덩이에 모두 흘러내려, 나의 느린 물장구에 잘게 부서졌다. 나는 유영했고, 건조하게 굳었던 마음은 유연해졌다. 그렇게 여느때와 같이 수영을 마친 날, 내가 일기장에 썼던 '그 문장'이 생각났다.

   

<체게바라의 갈림길에 선다>


오래 머무르는 여행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내가 떠난 진짜 이유는 떠오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일어나 걷고, 사고하고, 그리고 고민의 끝을 찾으려고. 현실의 일에 묶이지 않은 자유로움과 내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생각이 가능한, 체게바라의 갈림길에서 태양을 마주하고 싶었다. 갑자기 물에 뜬 기분이 들었다. 소독약 냄새, 내가 만들어내는 물결, 웅웅 울리는 소리와 듬성듬성 스치는 하얀 형광등의 불빛. 이 여행을 꿈꾸던 때의 감각이 다시 선명해졌고, 2014년 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힘있게 적은 일기가 떠올랐다. 나는 앓고 있지만 그 날 꿈꾸었던 그 땅에 서있다. 나는 아플지언정 푸르게 반짝이고 있으며, 마침내 사랑과 정의의 길을 걷게 될 터다.


    회사에 마음이 뜬 나는 사직서를 던졌고, 서울을 떴고, 24시간이 넘게 하늘에 뜬 비행기를 타고 여기에 왔다. 들뜬 마음에 건강을 챙기지 못해 뜨겁고 달뜬 숨을 내쉬고 있지만, 붕뜬 마음을 안고 가볍게 떠오른 걸음으로 이곳을 누빌 작정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은 몸을 쉬게 하지만, 회복에 실패하여 서울에 돌아갈 일에 대비해 사소한 감정과 감상을 기록하려고 한다. 내가 얼마나 크게 갈망했고, 왜 이토록 미련하게 이 여행을 놓지 못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어느 한 구석엔 가만히 앉아 빛을 내고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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