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보물

보물, 수술, 아이, 어머니

by 민들레



20200224_174153 (2).jpg

당신은 나의 보물


“여보! 여보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거야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말 아닌가요?”

“아직 그것도 몰라요? ‘여보’라는 말은 보물이라는 뜻이래요.”

무슨 그런 말이 있냐고 웃었다. 나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도 보물이 된다는 말인가. 하기야 남편은 나를 보물 다르듯 했다. 행여 넘어질세라. 걸음마다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치워주는 사람이다. 결혼 후, 살아오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수도 없이 겪으며 넘어지기를 몇 번 반복했는지 모른다.


농사를 짓다가 농약에 중독되어 병원에 실려 갔던 일, 고생한다며 선배가 사준 맥주 한잔 먹고 피까지 토했던 일. 남편은 술을 먹지 못했다. 몸에 술을 받아주는 유전인자가 없다고 했다. 당연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바다에서 작업하다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 뒤돌아보면 아슬아슬했던 나날을 우리는 살아냈다.

나는 결혼 후, 아이를 낳아 양육하면서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계속 아팠다면 서둘렀을 텐데, 아프다 좋아지곤 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큰 병이 될 줄이야…. 치료 시기를 놓쳐 결국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 십 년 그해 봄, 관절염이 악화하여 수술했다. 수술 후, 전신을 휘감고 있는 딱딱한 감촉에 더럭 겁이 났다. 깁스한 것이었다. 거대하고 딱딱한 통속에 갇힌 것 같았다. 아니 갇혀있었다. 가슴에서 발끝까지 꼼짝달싹할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칼로 뼈를 깎아내는 것 같은 아픔에 넓적다리관절 수술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보름 남짓, 수술 부위에 꿰맨 실만 빼고 겨우 퇴원하여 앉지도 못하고 누워서 봉고차에 실려 집으로 왔다. 이제 갓 첫돌 지난 아이가 엄마 모습에 놀랐는지 곁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를 보고 놀라서 울고 나는 아이를 보고 가슴이 미어져 울었다. 기특하게도 금방 울음을 그치고 젖을 달라고 칭얼거렸다. 깁스 속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절절맸다. 병원에 있는 내내 아이가 눈에 밟혀 얼마나 많이 울었든가.


보름이 넘도록 내 손으로 기저귀도 갈아주지 못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자식은 어미 없는 자식이라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곧잘 그렇게 말하며 나를 씻기곤 했다. 아이는 정말 꾀죄죄했다. 나와 남편이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나이 드신 시어머니가 제대로 챙겼을 리 만무했다. 내 몸 하나 아픈 것이 온 식구가 고달픈 생활 속에 빠져들었다. 시어머니가 돌봐주지 않았다면 더 큰 어려움에 빠졌을 텐데, 어머니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의 보살핌에도 어미젖이며 이유식을 먹지 못한 아이가 그새 말라 보였다. 남편이 병원에 오가며 돌보지 않았다면 아이는 그때 얼마나 서러웠을까. 깁스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금방 적응하지 못했다. 비록 움직일 수 없었지만, 한시도 아이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부르게 맛있는 간식도 먹이고 안아 주고 업어주고 싶었다. 아니 실컷 놀아주고 싶었다. 언제쯤 나는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넓적다리관절을 수술하고 4개월 동안 온몸이 깁스 속에 갇혀있을 때였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 지난 막내딸 기저귀도 갈아주지 못했다. 오히려 깁스에 갇혀 있는 내가 방 안에서 대소변을 누었다.

남편이 떠먹여 주는 밥을 먹다가 엎드려 밥을 먹었다. 차라리 엎드려 먹는 것이 누워서 먹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았다. 남편은 대소변은 물론 생리까지 손수 치워주었다. 그때 내 나이 30대 초반, 아이들은 한참 손이 갈 나이였다. 남편은 농사를 지었으니 들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환자인 나를 돌보는 일,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남편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밖에. 하늘에 기도하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누워있는 상태로 머리를 감아주고 깁스 속이 가려워 못 견디면 깁스에 톱질로 구멍을 내어 구리철사를 넣어 긁어주곤 했다. 한여름에 씻지 못한 것도 큰 곤욕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깁스를 풀었다. 수술 후, 처음으로 목욕을 시켜주다 나무처럼 굳어버린 몸을 안고 탄식하던 남편, 남편 눈에서 보석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나무처럼 말라버린 다리에는 시커먼 털이 수북이 나 있었다. 깁스에서 해방되었건만 깁스 속에서 움직이지 못한 관절이 굳어져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나무 둥치였다. 다시 방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혼자서 의자를 붙잡고 서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힘이 없어 쓰러지면 다시 의자를 붙잡았다. 며칠이 지나 겨우 의자를 잡고 일어섰다. 의자를 붙잡고 일어섰을 때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 일어섰다고. 의자를 붙잡고 일어서긴 했지만, 아기처럼 걸음마를 배워야 했다. 벽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발자국 떼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마치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겨우 목발을 짚고 밖으로 나오기까지 몇 날이 걸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날들이 흘렀다. 혼자서 운동을 하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피나게 노력했다. 양손에 목발을 짚고서라도 막내를 돌볼 수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아이들의 옷을 빨아 빨랫줄에 널었을 때, 그 기분을 누가 알까.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기만 했던 일이 나는 큰 기쁨이 되었다. 빨랫줄에서 바람에 그네 타는 아이들의 옷을 보며 꿈만 같다고 했다면 과장이었을까. 그때 내 마음은 그랬다. 그때는 세탁기가 없었다. 목발을 짚지 않고 걸었을 때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 후, 나는 방바닥에 마음대로 앉을 수도 없었다. 손이 닿지 않아 혼자서는 발톱을 깎을 수 없고 양말도 신을 수 없었다. 신발 역시 제일 신기 편한 신발을 골라서 신게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잘해주지도 못했다. 마음은 내 아이들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키우고 싶었다. 몸이 불편한 나는 엄마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식들한테 위로받으며 산다. 그래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엄마가 더 편안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명절에도 여행을 자주 못 하는 엄마를 위해 밖에서 보낸다. 해마다 추석 명절은 여행지를 바꿔가며 명절을 보낸다. 집으로 오면 엄마가 신경 쓰느라 고생스럽다고 굳이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남편은 퇴직 후, 건물을 청소하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청소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인부들을 대동하고 일을 처리한다. 장애인복지관 대청소 자원봉사를 10년째 하고 있다. 인부를 대동할 때면 인건비를 남편이 지급했다.

건강하다고 믿었던 남편이 간암에 걸려 수술했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깨우려고 꼬집어 온몸에 푸른 멍이 들었다. 몇 시간 만에 간신히 깨어난 남편. 새 삶을 살게 되었다. 투명 중에도 한해도 빠지지 않고 복지관 대청소 봉사를 계속 이어왔다. 미리 복지관을 둘러보고 알아서 했다. 살면서 최고로 기분 좋은 일이 봉사할 때라고 말한다.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복지관 청소를 한단다. 그곳에 다니는 이용인들이 내 가족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란다. 남편은 2023년 12월 장애인복지관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아무리 사양해도 만들어준 상패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이 없다. 남편을 웃게 하려고 철없는 행동을 한다. 암 환자는 웃음이 약이라고 했다. 텔레비전에서 가수들이 춤추고 노래하면 나는 그들을 따라서 춤을 춘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사람이 하는 꼴이라니…… 남편은 가만히 보며 웃기만 한다. 나는 춤추자고 손을 잡아끈다.

“여보, 우리 춤 한번 춰봐요. 탱고는 못 춰도 막춤은 가능하지 않은가요?”

춤추는 척하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남편은 다시 주저앉고 만다. 춤을 잘 모르지만 그럴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더듬어보면, 어떤 큰 힘이 나를 지지해 주고 이끌어주었다는 느낌이 든다. 내게 일어난 일들이 마치 기적 같아서 아니 기적이었다. 절망을 딛고 일어나 보니 인생관이 달라졌다. 지금도 열심히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중이다. 그림을 배우고 우드 버닝을 배웠다. 어설프더라도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 뒤엔 나를 믿고 지지해 준 가족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주는 남편의 손은 언제나 따스했다. 아픈 곳에 가만히 손을 대주면 마치 찜질팩을 올려놓은 것처럼 통증이 사라진다. 그 따뜻함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딛고 씩씩하게 일어설 수 있었다. 내 곁에 귀한 선물로 온 아이들, 스스로 잘 커 준 아이들 덕분에 내가 지금 이만큼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 하필 나만 아파야 하냐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마음 끓이던 때도 있었다. 쉬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도 태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처럼 잘 지나갔다. 어떤 어려움도 마음에 따라서 그것이 기회가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변함없이 함께한 가족들과 나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한없이 고맙다. 자식들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제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코흘리개 막내가 커서 선생님이 되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 엊그제 작가가 되어 책을 발간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나에게는 분명히 기적이었다.


지금은 하루 네 시간 도서관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도서관에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남편은 시간만 나면 커피를 끓여주며 공부하라고 재촉한다. 그 덕에 늘 책을 읽으며 글쓰기를 한다.

편안하게만 살았다면 인생의 깊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불편함을 이겨내며 살아온 날들이 나에게 큰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돌탑을 쌓을 때 작은 굄돌이 큰 돌을 지지해 주듯 누군가가 나를 지지해 준 큰 힘,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늘 기도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남편은 어머니가 살던 시골집을 꽃집으로 가꾸고 있다. 넓은 뜰에 가득 사시사철 꽃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말처럼 내일 죽더라도 꽃을 심겠다고 한다. 지금 이렇게 사는 일이 우리는 복 받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늘 감사하며 복지관 대청소 봉사를 계속해서 하겠단다.

아침에 출근하는 나를 데려다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무탈하게 잘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남편은 당신보다 내가 일주일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나를 먼저 보내고 뒷정리해 주고 당신도 따라서 오겠노라고…….

우리 그렇게 기도하자고 했다. 아내를 혼자 남겨놓기 싫은 남편의 마음이다.




무얼 더 바라랴!


아침에 눈 뜨고 세상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어 행복하고

자연이 주는 산소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 행복하다


고운 사람들과 통화할 수 있어 행복하고

글을 읽을 수 있고,

글 한 줄 쓸 수 있어 행복하다


내 글을 감명 깊게 읽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가족이 있어 행복하고

내 몸에 다리가 붙어있어 행복하다


곁에서 지지해 주는 동행이 있어 행복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세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 행복하다


오늘도 어려운 이웃들이 삶의 무거움을 털고

꽃길 걷듯, 평온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높고 낮음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


남편은 내가 보물이란다.


작가의 이전글국밥 한 그릇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