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의 사회문제론 강의를 듣고 귀가해서 임승수 선생님의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을 읽는데 때아닌 비상계엄 소식이 들려왔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의 담화가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뒤이어 국회근처에 장갑차가 진입하는 등의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고 나는 이를 지켜봐야만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국회의원들은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은 계엄령선포는 불법이다. 불법계엄령에 따르는 군경은 그 자체로 내란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 장병들은 국민의 편에 서달라”고 말했고, 국회본회의장에 모여 계엄해제 요구안을 가결했다. 이에 대통령이 계엄해제 요구안을 수용하지만 상황은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과 종북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인 즉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같은 반국가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하니,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나는 작금의 시국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관점에 공감하지 못했다. 역사책에서나 접했던 계엄을 ‘2024년’에 마주하니 "...??? 이게 왠 뜬구름잡는 소리고" 싶다. 꿈인지 현실인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계엄사령부 측의 포고령을 접하고서야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아래는 계엄사령부 포고령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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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전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2024.12.3.(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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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고령 내용이 위헌적이고 계엄선포의 절차가 지켜지지 않아 계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소식 역시 접했지만 계엄사령부와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이 포고령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렸다.
오금이 저리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했을까.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정치적인 계산이나 이득을 위해서 벌인 일 같지는 않아보였다. 여러 가설을 세워보고 정보를 종합해도 납득이 가지 않던 찰나 "대통령이 ‘애국심’으로 계엄을 선택한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 뇌리에 꽂혔다.
임기 중 대통령은 하락하는 지지율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행보가 자유민주주의를 대변하는 것인냥 당당했다. 그리고, 어제밤 10시에 나타나 보여준 대통령의 사고방식은 반공 = 자유민주주의수호 = 애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애국자라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난 3년동안의 행보와 그 연장선상에 놓인 계엄선포는 있을 수 없다. 저쪽집단이 민주화 이후에도 반공 = 자유민주주의수호 = 애국이라는 공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본다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대통령이 언급해왔던 자유민주주의는 광범한 개념이다.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대체로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기본권을 박탈하지 않는다. 애초에 대통령이 공산세력, 반국가세력으로 지목한 민주당은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이 북한과의 교류와 한반도내 평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유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새로운 시장개척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것이지, 사회주의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북한을 사회주의정권으로 볼 수 있나에 대한 의문과 갑론을박이 있지만) 설령, 일부 시민이 북한과 사회주의를 따를지라도 계엄령을 긍정할 근거가 되진 못한다. 범죄사실이 있다면, 적법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수사하고 처벌해야하는 것이지, 날림으로 계엄령을 선포할 근거가 될 수 없다.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은 늘 ‘자유’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녔다. 또 그것을 자신의 애국심과도 연계해, 국민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 뜻이 가로막히자,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계엄선포는 뒤틀리고 그릇된 애국심이 빚어낸 '우발적 범죄'인 것이다.
단정짓기에는 이르지만, 이로써 어떤 애국은 대다수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듯 하다. 무심코 바라본 태극기의 형체와 애국이라는 단어가 못나보이고 무색해지는 계절이다.